: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제24일 차(Astorga to Foncebadon), 25.9km; Oct. 14, 2017)지
만 행복했던 순
10월 14일 토요일. 아스토르가의 성벽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그 뜨겁고, 고독하고 끝이 없을 같았던 대평원, 메세타와 완전히 작별하고 '레온 산맥(Montes de León)'의 품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해발 870m의 아스토르가에서 출발해 1,430m의 폰세바돈까지, 약 600m의 고도를 서서히 높여야 하는 만만치 않은 오르막 코스다. 하지만 , 며칠간 잘 보살핀 덕분에 발바닥의 통증도 조금 완화되고 있고 무엇보다 든든한 살로몬이 있어서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았다.
초반 여정은 '마라가테리아(Maragatería)'라 불리는 독특한 지역을 관통했다.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Murias de Rechivaldo)와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 이름도 긴 이 마을들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돌로 지은 투박한 집들, 그리고 마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낸 대문들이 인상적이었다. 옛날 짐을 나르던 마라가토(Maragato) 상인들의 강인한 기질이 마을 풍경에서도 묻어났다.
13km쯤 걸어 도착한 엘 간소(El Ganso) 마을. 이곳엔 순례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카우보이 바(Mesón Cowboy)'. 스페인 산골 마을에 뜬금없이 나타난 서부 영화 세트장 같은 곳. 문을 열고 들어서니, 텍사스 황야의 주점 같은 이색적인 분위기가 순례자를 압도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잡동사니와 벽을 가득 채운 순례자들의 낙서들. 이 엉뚱하고 유쾌한 공간에서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황야의 무법자'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힘든 오르막길을 앞두고 만난, 사막의 신기루 같은 유머였다.
고도는 점점 높아지고 떡갈나무 숲이 짙어질 무렵, 산중턱의 마을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에 닿았다. 이곳은 중세 템플 기사단이 순례자를 보호하던 거점이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이 그 역사를 이어받아, 매일 저녁 작은 로마네스크 성당에서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로 저녁 기도(Vespers)를 올리고 있고, 실제로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기 위해 일부러 라바날에서 묵어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는 폰세바돈까지 더 가야 해서 저녁 미사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마을을 감싸고 있는 차분하고 성스러운 공기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라바날을 지나자 길은 더욱 가파르고 거칠어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폰세바돈(Foncebadón)이 안갯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때 주민들이 모두 떠나 완전히 버려졌던 '유령 마을'이었다. 무너진 돌담과 지붕 없는 집들이 앙상한 뼈대처럼 남아있어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마을은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사이로 투박하게 고쳐 지은 알베르게와 식당들이 따뜻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과거의 폐허와 현재의 생명이 공존하는 기묘한 풍경. "여기서 자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와일드했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순례자의 밤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었다. 다른 마을처럼 잘 정돈된 느낌이 아니라, "공사 중인 유적지" 혹은 "거친 산장" 같은 느낌이 강했다.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 있는 듯한 이 느낌이 이 마을의 매력인 것이다.
알베르게 창밖으로 차가운 산바람이 불어왔다. 폰세바돈은 순례길의 상징과도 같은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이다. 내일 아침이면 내 배낭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담아 온 '무거운 돌' 하나를 그 십자가 아래 내려놓게 될 것이다. 살로몬 신발 덕분에 무사히 산을 올랐고, 폐허 속에서 따뜻한 잠자리를 얻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내일 마주할 감동을 예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24일 차의 밤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