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26)

: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26. 영혼의 돌을 내려놓고, 노을빛 고성을 걷다

:까미노 제25일 차(Foncebadon to Ponferrada), 27.3km; Oct. 15, 2017)


1)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비우다


10월 15일 일요일, 아침 7시. 폰세바돈의 차가운 산바람을 뚫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까미노 프랑스 길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인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를 넘는 날이다. 해발 1,500m에 가까운 고지대의 공기는 날카로웠지만, 하늘은 더없이 맑아 오늘 마주할 순간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얼마 걷지 않아 파란 하늘 아래 앙상한 나무 기둥 끝에 달린 작은 철제 십자가가 보였다. 그 아래는 수천 년간 순례자들이 두고 간 돌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었다. 나 역시 주변에서 작은 돌 하나를 주어 그 돌무덤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삶의 무게이자, 회환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나 자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집착이었다.


돌을 던져 올리는 순간, '툭' 하고 돌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마음속의 응어리 하나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가벼워져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을 받은 듯, 가장 높은 곳에서 나는 비로소 가장 가벼워졌다.


30EA20B1-5236-4D2D-AE0D-493C059E9EFC-672x372.jpeg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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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릎을 시험하는 하경길, 해발 1,430m에서 500m대까지


철의 십자가를 지나며 시작된 하경길은 평화로운 능선 산책도 잠시, 이내 무시무시한 급경사로 변했다. 해발 1,430m에서 500m대까지 1,000m 가까운 고도를 급격히 낮춰야 하는 고행의 길이었다. 하지만 맑은 날씨 덕분에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비에르소(Bierzo) 분지의 전경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기서 며칠 전 레온에서 구입한 살로몬 트레킹화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족저근막염으로 비명을 지르던 내 발바닥을 탄탄한 쿠션이 감싸주었고, 미끄러운 자갈길에서도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주었다. 만약 예전의 낡은 신발이었다면 아마 이 내리막에서 무릎이나 발목이 먼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장비에 대한 투자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실감하며, 엘 아세보(El Acebo)와 몰리나세카(Molinaseca)를 지나 드디어 평지에 발을 내디뎠다.



3) 폰페라다의 환영


눈부신 오후의 햇살 오후 4시경, 오늘의 종착지인 폰페라다에 들어섰다. 산맥을 내려오니 공기는 한층 따뜻해졌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도시 전체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맑은 햇살 아래 그 질감을 선명하게 드러냈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27km를 걸어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맑은 공기 속에 반짝이는 돌길과 멀리 보이는 고성의 실루엣은 피로조차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뒤 창밖을 보니, 폰페라다의 오후는 아침에 만났던 거친 산맥의 위용과는 또 다른, 우아하고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4) 템플 기사단의 성: 황금색 야경


저녁이 되자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몸을 숨겼고, 도시는 주황색 가로등 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 시내에 나섰다.


폰페라다의 상징인 '템플 기사단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이 조명을 받아 웅장하게 빛나고 있었다. 12세기, 순례자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던 기사들의 요새.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아 타오르는 성벽과 높은 탑들은 중세의 기사들이 금방이라도 말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맑은 밤하늘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성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밤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 덕분에 성의 세세한 조각들까지 눈에 들어왔고, 마치 중세의 어느 밤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을의 작은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수프와 와인 한 잔을 들이키며 오늘 하루를 복기했다. 철의 십자가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냈고, 험난한 산길을 무사히 내려왔으며, 이제는 템플 기사단의 가호 아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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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맑은 날씨는 어쩌면 산을 내려온 순례자에게 세상이 건네는 가장 화창한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발바닥의 통증은 여전하지만, 마음만큼은 저 하늘처럼 투명하고 가볍다. 폰페라다의 깊은 밤, 고성의 향기를 마음에 담으며 25일 차의 일기를 덮는다.


@Alberge St. Nicholas de Flue



20171012_201445685.jpg 템플기사단의 고성 @Ponferr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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