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아프지말자
2010년, 막학기를 다니며 한창 취업으로 골머리를 썩던 시기였다. 과신했던 서류접수부터 계속 탈락하고 자신에 대한 의문마저 생길 시점이었다.
복통과 설사가 있었지만 대충 약을 먹으며 무심결에 지나갔고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날 열이 40도가 넘고 아무리 해열제를 먹어도 열은 떨어지지 않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먹는 족족 구토와 설사로 이어졌고 결국 나는 응급실로 가야했다.
대장염이었다. 병을 키웠던 탓에 10일간 금식 치료를 받아야했다. 아파서 처음으로 해야했던 대장내시경은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그 맛없는 4리터의 약을 반은 마시고 반은 토했던 것 같다. 엉엉 울면서 그 약을 먹었다.
겨우 실시한 대장내시경 결과는 대장벽 전체를 둘러싼 하얀 염증더미였다. 곳곳에 피도 맺혀있었다. 의사선생님은 한심하다는 듯 지금까지 이렇게 병을 키워서 온 사람도 흔치 않다고 했다.
치료도 검사만큼 고통스러웠다. 금식탓에 하루에도 대여섯통의 수액을 맞아야했고 열은 입원상태에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은 열이 나면 엄마처럼 이불을 덮어주지 않는다. 이런 고열에는 얼음 주머니를 사지에 대고 이불을 치워버린다.
한밤중 조용한 병실에서 차갑디 차가운 얼음주머니를 끌어안고 내 생애 가장 간절한 기도를 했다.
이번에 병만 나으면 정말 열심히 살께요
제발 낫게만 해주세요 너무 괴로워요
긴 금식탓에 머리카락이 한주먹씩 빠졌다. 수액 주사 자국이 팔에 온천지가 되면서 시원하게 샤워도 하지 못했다.
퇴원은 면접 때문이었다. 결국 떨어지긴 했지만 내 생애 최악의 시기였다. 퇴원후 한달간 죽만 먹어야했고 나는 그 기간동안 가만있어도 살이 죽죽 빠졌다.
가끔 열심히 살지 못할 때면 그 때가 생각난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도 아닌 그냥 어두운 천장이었고 내모습을 보지도 못했지만 마치 드라마 장면처럼 내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얇은 병원복에 얼음주머니를 껴안고 턱이 덜덜 떨리도록 떨면서 정말 간절히 소망했었다.
너무 애쓰지마
그런데 요즘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열심히 살았는데 저 끔찍한 대장염은 저 정도는 아니었어도 14년에 한번 돌아왔고 18년인 지금 마침 또 돌아와서 날 괴롭힌다.
점점 그 정도는 약해졌다. 10년보다 14년이 덜 아팠고 염증도 덜했고 14년보다 18년이 덜 아프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난 너무 열심히 살아서 아픈걸까?
' 미생'에 나오는 구절 중 마음에 드는 곳이 '애쓰는데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라는 평이다. 나의 열심이 혹은 애쓰는 노력이 마음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스러워질 때면 내 몸은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닐까.
'스트레스 관리'라는 쉬운 말로는 이 깨달음을 설명하지 못하겠다. 오는 모든 기회를 타인의 요청을 나는 '열심'이라는 단어로 거절하지 못해왔다. 어찌보면 타인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했다.
이번에 내가 아프면서 해본 가장 큰 도전은 '내려놓기'다. 내가 작업해야할 일을 팀원에게 넘겨 버리고 처음으로 여러가지 기간에 대해서도 어기고 내 페이스대로 딜레이 시켜봤다. 여러 요청에 대한 대답도 컨디션에 맞춰 천천히 할거다. 매번 상대의 시간을 맞추기위해 밤을 새고 고민하던 태도를 잠시라도 내 위주로 해보고 싶었다. 집에서도 현재 파업중이다. 난 환자니까.
이제 마음대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너무 자연스러운 수십개의 감정을 여러 사람 눈치보느라 감추고 아끼고 티내지 못하고 맞춰왔다.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카톡에서 차단했다.
대장염은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 그 차가운 기억이 매번 인생의 변곡점마다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기억이 고마운 건 덕분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
아프진 말자. 하지만 또 아플 수 있단 건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