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그냥 Mar 15. 2021

가장 독하게 살던 시절의 기억

느슨해지는 것은 그저 내탓이다


매일 매일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울었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낮은 대학에 갈까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결막염에 잔뜩 부은 눈을 감고 6시15분까지 학교에 가서 아침 0교시를 들었었다.

아침부터 야자시간까지 언어, 수리. 사탐, 외국어를 1강씩 풀어버리고는 밤 11시에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20분간 지하철을 타고 집앞 독서실에 들어가서 또 풀어댄 문제집의 채점을 하고 나면 새벽2시였다.

집에서 3분거리였지만 새벽 2시에 독서실이 닫을 시간에 터덜거리며 나오면 아빠나 엄마가 서있었다.

그 시간에 TV를 켜고 투니버스에서 이누야사를 보고는 잠들었다.

주말에는 가장 예쁘게 사복을 차려입고 독서실에 갔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면 엄마는 국밥부터 비빔면을 해뒀고 나는 재빨리 딱 1시간먹고 돌아갔다.

그렇게 일주일이면 보통 7회에서 8회 들어있던 모의고사형 문제집을 다 풀어서 다 푼 문제집이 4권이 나왔다. 일요일 저녁에는 엄마나 아빠와 동네 가장 큰 서점에 가서 다음주를 버틸 문제집을 또 4권 샀다.


마치 전리품처럼 다 푼 문제집은 대충 내 방 바닥에 던져놨었다. 바닥에 가득한 그 문제집을 밟고 다니며 마치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고 3이 끝나고 나서 그 문제집들을 치울 때 고물상아저씨가 2번이나 다녀가야했다.


그리고 난 수능날 기계인간처럼 1과목당 20여분내에 다 풀고 2번씩 더 풀었다. 수능직전 모의고사때도 그랬었다.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500점 만점에 480점대를 받았고, 쉽게 출제됐던 수능은 1개틀린 외국어가 2등급을 받은겅 외에 전체 1등급이었다.

결과는 수시 논술형으로 붙었던 성균관대에 붙었지만 수능점수 전국 상위 1%라며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고1때 전교 20등 내외였는데 고3이 되서야 전교1등을 수능점수로 채우면서 화려하게 고3을 마무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집은 당시에 등록금낼 돈이 없었는데 장학금 덕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풀어댄 문제집들도 결국 그 서점에서 열린 영수증 이벤트가 당첨되면서 김치냉장고가 되는 행운이 연달아 텨졌었다. 2004년말에서 2005년 나의 가장 독하게 살던 시기의 이야기다.


요즘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단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한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끝나고 이직을 하고 달라진 환경속에서 종종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들고 그리고 내가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가 두려울 때가 있다.


유튜브에서 공단기 전효진 강사의 사시패스에 대한 강연을 봤다. 들으면서 예전의 고 3때의 내가 떠올랐다. 난 그 분처럼 엄청난 비장함과 책임감은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하얕게 불태웠었다.


그런 승리의 기억은 꽤나 오래간다. 어쩌다가 내가 그 감각을 일시적으로 잃었었나 싶다. 미친척 달려드는 그 기분은 중요한 기로에 섰을 때마다 날 살렸었는데! 어째서 나는 이 기분을 잠시나마 잃었던걸까. 오히려 고3의 나는 1년 뒤를 내다보는 현실감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인생을 고3때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왜 나의 주말도 이렇게 힘이 드나에 대한 질문의 지금 1년뒤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장 1년전의 나만해도 온 전신의 세포를 집중해서 오픈테스트와 책마무리 작업에 애쓰고 있었다.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었나 기억해보자. 지금의 노력이 또 내년의 나를 만들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소중한가.

못한다 안한다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원래 바쁜 중에 하지 못하면 한가한 중에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쉽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성장하고 있단 증거일수도 있다. 세상이 나의 작은 노력을 봐줄 거란 착각말자. 큰 노력을 해야한다. 그 때만큼 0530-0230로 하루를 보내야 1년뒤가 보장되던 시간도 있었음을 기억하자.


 문제집을 풀 때는 한번도 100점이었던 적이 없었다. 오답노트가 없다면 그 문제집은 풀은게 아니었다. 그 때는 문제집이었다면 인생에는 그저 여러가지 미션이 있을 뿐이다. 때론 그 모든 일에 오답노트는 필수일 것이다. 그걸 고칠 기회는 앞으로도 계속 있지 않을까?

 

 나는 실전을 풀며 살아가고 있다. 세포까지 집중했던 신체의 감각을 잊지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SOPT 27th 앱잼 멘토 참여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