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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Jan 06. 2017

나답게 게으르고 부지런하게 사는 방법

계획이 어긋나는 휴일의 법칙.

항상 계획은 완벽했다.

 노는 날이다. 그것도 남들 일하는 날 노는 날이다.

몇일 전부터 내 머리 속에는 오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남편은 출근했으니 나만의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볼 참이었다.


 7시 반에 남편이 출근할 때 배웅하고 난 뒤  9시쯤 일어날 생각으로 누웠다. 나의 멋진 하루는 9시부터였다.

 뭔가 흠칫 놀라며 일어났더니 오후 1시였다. 문득 당황스러웠다. 계획들을 생각하니 등줄기가 섬짓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마취총이라 쏜 것처럼 내 시간이 잡아먹혔다.


의지의 문제라는 마약같은 핑계

 항상 그렇듯이 계획은 완벽했다. 오늘도 시간을 아껴가며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계획대로 다 해도 시간이 남으면 책도 보고 중국어 복습도 하려고 했다.


 사실 이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나의 게으른 늦잠의 역사는 내 수명만큼 오래됐다. 평생 늦잠 자왔고 엄마에게 구박을 들어왔다. 그리고 매번 아침일찍 일어나는 계획을 짰고 매번 실패했다. 어제와 다르게 정작 쉴 수 있는 상황만 되는 나는 살던 방식대로 행동해왔다.

 어릴 때는 스스로의 박약한 의지를 탓했다. 엄마의 말보다도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가슴 뻐근한 당황과 자괴감에 오늘은 망했다며 더 엇나갔다. 보기로 한 책도 옆으로 치워버리고 아무도 없으니 텔레비전도 더 열심히 봐버렸다.

  '의지와 끈기가 약하다' '지구력이 약하다'는 엄마의 평가와 그 말에 대한 묵묵한 동의는 그렇게 내 유년시절을 장악했다. 엄마는 잘 좀 해보라며 의지가 없다고 나무랐지만 어느새 그 말은 반대로 작용했다. "난 의지가 없으니까 그런 노력은 어차피 못한다"고 생각해 버렸다.

 머리로 공부하던 중학교때와 달리 고등학생이 되자 이 생각은 아주 빛을 발했다. 고1 때 수학과 체육과목에서 '양'을 받고도 생글거렸던 건 의지박약이라는 단어에 완전히 인정해 버렸던 탓이었다. 교묘하게도 나는 '의지가 없다'는 마약같은 말로 아무 의미조차 주지 않은 날이 많았다.


같은 늦잠, 다른 반응


 그러다가 생뚱맞지만 난 첫사랑을 겪었다. 짝사랑에 가까운 '송아지사랑'이었다. 데이트 몇번을 하고 고3이 된다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어린 나는 속상했다. 매달릴 것이 없어서 안하던 과목까지 펼쳐가며 사정없이 눈앞에 일들에 매달렸다.

 그렇다고 생활습관이 달라진 건 없었다. 난 어차피 게을러서 주말에는 늦잠을 잤고 어떤 날은 아예 비가 오면 학교를 결석하는 날도 있었다. 비가 오면 더 못일어 났으니까. 그저 첫사랑에 대한 생각을 안하고 싶었기에 주어진 눈앞에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수업에 집중했고 남는 시간은 재밌어보이는 일들을 했다. 정신없이 빠질만한 것들만 했다.

 남들이 유명한 성문종합영어를 풀며 수능준비할 때 나는 멋있어보이는 영문문제집을 구해서 영영사전으로 몇번 찾아봤다. 개념원리와 정석도 재미없어보여서 일부러 다른 수학문제집을 샀다.

 밤새 몰래 인강사이트의 URL의 규칙을 풀어내며 도강도했다.그치만 동영상 주소만 알아내고 듣지 않았다. 그냥 URL파라미터의 규칙을 파헤치는 재미였다. 혼자 홈페이지 만들고 밤에는 투니버스를 진심으로 열심히 봤다. 그저 지금 당장 빠질 수 있는 건 다 했다.

 엄마는 여전히 한마디씩 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어이없게도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고2때 겪은 작은 실연일 뿐이었는데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고3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교2등도 해보게 됐다. 문제집은 어느새 누구보다도 많이 풀어대고 있었다. 수능은 더 놀라웠다. 고2 올라갈 때 모의고사점수보다 거의 50점 이상을 더 올리게 됐다.

 사실 1학년 내신이 안좋았고 모의고사 점수도 인서울이 어려웠기때문에 일찌감치 논술 비중이 70%가 넘는 수시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부보다 글쓰기가 훨씬 재밌었고 논술에 도입부에 쓸려고 TV광고들의 카피들을 수집했다. 

 결과는 논술로 입학했지만 수능덕에 장학생이 되었다. 공부 소질이 많지도 않았는데 신기했다.

 

 엄마는 변했다. 내가 주말에 늦잠을 자고 명절날 귀찮아서 친척집에 안간다고 해도 나에게 게으르다고 면박주지 않았다.


의지가 아니라 행동의 차이

  내가 수능공부에 의지가 많았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 않았다. 난 그냥 실연당한 어린애였다. 매일  울었다. 그냥 비련의 여주인공이고 싶었다.

 단지 우연히 슬픈 여주인공이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찾은 것이 일단 깨고 나면 눈앞의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늦잠을 자건 학교를 빠지든 그것과 관계없이 나는 관심사에 많은 관심을 주었던 것뿐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은 행동을 직접 했다는 점이었다.

 그냥 그 때의 작은 의도치 않은 성공은 나에게 삶의 방식을 바꿔주었다. 내가 늦잠을 자고 오늘 할 일을 빠르게 하지 못해도 어쨌거나 나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작은 믿음이 생겼다. 대학생이 되니 그런 삶의 방식이 더 빛을 발했다. 물론 공부는  평균지키기도 힘들었다. 게으른 나는 학점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무엇이든 매일 매일 시간표처럼 지켜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저 눈앞의 관심사에 관련된 기회가 나타나면 무조건 잡으려고 했다.

 휴학관련 블로그가 없길래 내가 만들어 버렸고 다양한 공모전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끌리는 순간에 그대로 바로 집중해 버리면 적어도 뭐라도 얻을 수 있었다. 직장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 과정들과 직업에 관심갖고 찾던 과정들. 전부다 이런 방식이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프로젝트가 주어지든 아니든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관심사와 지금하는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살아왔다. 그런 표현으로 브런치 글도 시작했다.


그냥 지금 생각나는 걸 하자

 오늘 나는 일찍 일어나서 집안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를 한 뒤 브런치에 '대한민국 이커머스의 역사'의 연재 글을 작성하고 제안서 하나를 쓰려고 했다. 이 역사 글을 컨텐츠로 교육제안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할 때쯤 저녁밥을 하려고 했다.

 난 완전 늦잠을 자버렸다. 분명 놀랐다. 그치만 뭐 어때. 늦잠 자는 것도 그냥 나일 뿐인 걸. 오늘 늦잠을 잤다고 뭐가 아주 잘 못 되는 건 없다.

 늦잠에 괴로워만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고등학교때 실연당한 후에 그 생각만 죽어라 반복한다고 떠나간 놈이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계획 밖의 일이나 기대없는 일이라도 눈앞의 흥미롭고 집중할만한 일을 하면서 다른 감정을 갖는 것은 나만의 '치트키'다.


  나는 오후 1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 늦었지만 집청소늘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생각지도 않게 남편은 밥을 먹고 들어온단다. 저녁밥 지을 계획을 지워버렸다.

 대신에 다른 아이디어가 생겼다. 지금 난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나답게 게으르게 사는 법'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글하나 남길 수 있는 부지런한 하루가 된 것 같다.

 

 거대한 무언가를 위해 의지를 키우고 유지하는 힘이 나는 정말 약하다. 대신에 난 게으르고 작게 그냥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생각들을 실천한다. 매일 매일 안하면 좀 어떠냐. 그런 날들이 한 방향으로  쌓이다가 내 길을 보여줬었다.

 그냥 오늘도 잠들 때까지 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다가 잘 거다. 그리고 내일도 토요일답게 늦잠을 잘란다.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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