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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Jul 02. 2022

아련해지는 나의 글쓰기 역사

그 때로 돌아간다고 더 잘 살 것 같지도 않지만,


여름휴가를 다녀오고 무언가 버튼이라고 눌린 것처럼, 옛 기억들을 되돌아보고 있다.  

이번에 여름휴가를 간 호텔에서 고요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쓰고 고치는 작업을 하다보니, 나에게 글이란 어떤 의미인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게 아마도 버튼이었나보다. 30대의 후반, 어느새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많이 생겼다는 게 새삼 신기할 뿐이다.


난 과연 언제부터 글을 썼는가를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라고 해야하나 중학교 2학년때부터라고 해야하나 고민된다.


초등학교 2학년때 시를 썼다. 무슨 모짜르트 피아노 건반 치는 소리냐 싶겠지만, 사실 대단한 시를 쓴 것은 아니었다. 당시 담임선생님이셨던 황인숙 선생님고작 2학년들인데도 '동시'를 쓰는 것을 몹시 강조했었다. 특히 수업에 규칙이랄 것이 없이 언제든지 동시를 써서 제출하고 친구들 앞에서 읽기만 하면 선물이나 칭찬을 해주셨다. 매월 '동시 왕' 같은 것도 뽑았는데 칭찬에 몹시 약한 타입인 나는 항상 이 타이틀이 너무 가지고 싶어서 무슨 단어만 보아도 동시를 써서 선생님에게 들고 갔었다.

글의 수준과 상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 호들갑스럽게 칭찬해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나 스윗하고 달아서 글에 대한 첫 기억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내가 글을 잘 쓸지도 모르겠다는 정성스러운 착각을 머리 속에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는 아이돌 빠순이였으나 전형적인 MBTI 'T'인 나는 중학생 때 방송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무작정 아이돌을 쫓아다닌다고 나를 알아줄 것도 아니고, 그러기엔 내가 무슨 초특급 미녀도 아니었기에 실력(?)으로 승부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터넷 방송국에서 중2때 우연히 방송작가로 일할 수 있었고, 박경림 언니가 진행하는 토크쇼 방송을 반년 정도 함께 했다.

그 때 나는 방송작가 언니 옆에서 도우면서 큐시트를 쓰거나 방송 구성 꼭지를 마련하는 방법들을 배웠고, 당시 방송국 건물에서 목에 사원증 걸고 당당하게 '신화'를 대기실에서 직접 보는 행운도 얻었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같았지만 그 시간은 그 방송국이 문을 닫으면서 자연히 막을 내렸다.


그 다음은 팬픽을 써보려고 했었다. 끈기도 없지만 연애도 해본 적 없던 내가 팬픽을 쓰는 것은 무리수였다. 매번 몇 번의 시작만 하다가 포기했다.

끈기가 없는 타입이라 어릴 때 한국고전문학 중 단편소설만 수차례 읽었다. 막연히 소설을 읽으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3때는 문학 선생님이 굉장히 특이한 분이셨는데, 다양한 활동을 시켜주셨고 잘한 친구들에게 칭찬카드를 주셨다. 칭찬 콜렉터에 가까운 내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알퐁스도데의 '별'이라는 단편소설의 뒷 이야기를 쓰는 활동을 했었는데, 여성주인공이 너무 수동적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늑대인간'을 섞어서 썼던 것이 기억난다.  '별'의 양치기와 여주인공 '스테파네트'가 밤에 별을 보고 있을 때 늑대인간이 쳐들어오고 둘은 피하는 이야기였던가...    칭찬카드를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재밌었다. 그리고 우리 반의 연극부 친구도 재밌어했다.

둘은 의기투합해서 그 해 중학교 축제에서 연극부가 연극할 희곡을 쓰기로 했다.  콩쥐, 줄리엣, 스테파네트가 어떤 이유로 모여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에서 남자주인공 시점에서 이루어진 내용들을 비틀어보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콩쥐가 일부러 도령 보라고 꽃신을 흘렸다거나 그런 식이었다. 내가 좋았던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평생 고마운 기억인 내가 집필한 연극을 축제에 올리는 행운도 가졌었다.

참,  그 때 그 축제의 MC는 학생부회장이었던 지은이가 보았는데. 그 때 지은이가 워드프로세스를 다룰 줄 몰라서 그 집에 가서 내가 매달 학교에서 발행하던 학보지를 대신 만들어주고 있었다. 지은이의 축제 사회 대본도 함께 썼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인데 그럴듯한 작가 스텝이었다.


그치만 진짜 글을 많이 쓰게 된 것은 계기가 따로 있었다. 이렇게 중2, 중3때 글쓰기에 여러방면으로 관심이 생기면서 글쓰기 관련 커뮤니티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 곳에는 수많은 독후감과 창작시와 창작 글들이 가득했다. 나는 거기서 창작시를 쓰던 동갑내기의 시를 보고 감탄하며 그 커뮤니티에 정착했다. 나이 그대로 중2병 스러운 친구들이 우글우글모여서 거기서 온갖 이야기들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많은 시간을 쏟았다.

중2때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들,  남자, 사랑, 연애, 우정, 학업, 성적 등등 우리는 온갖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했다. 전혀 다른 지역에서 서로 사는 수준도 다른 너무나도 다른 친구들이 중2때부터 만나서 고등학생이 될때까지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 시절에 내가 써놓은 글을 못봐줄 수준이긴 한게, 나는 인터넷 어체도 많이 쓰고 있었고 스스로 막내여서 귀엽다고 생각했던 탓에 캐릭터가 손발이 다 없어질 지경의 말투를 쓴다. 게다가 사실 그 당시부터 아빠의 병이 조금씩 나타나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있었기에 그 당시의 친구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며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어찌보면 감사한게 그 중요한 시기에 삐뚤어지거나 할 시기를 건전한 곳에서 건전하게 만나서 건전하게 이야기나 나누면서 지냈다는 것이 고마울 정도.


고등학생이 되면서 내 글을 문학보다는 비문학쪽으로 많이 넘어갔다. 운명의 논술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선생님이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드물다'고 지나가는 말로 해주신 것이 나에게는 완전히 용기로 자리잡았고,

내 성적으로 쉽지 않았던 대학을 논술 전형으로 용기있게 지원해서 갈 수도 있었다.

몇 가지 글쓰기 스킬도 익힐 수 있었는데, 첫 도입부를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 때 배운 것이 룰처럼 작용하고 있다.

 

대학생때는 작가보다는 PD와 기획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 카메라와 편집등에 대해서 공부했었다.

소질이 없었기에 큰 성과는 없었지만 구성력은 많이 배웠었던 것 같다.

지금 엉망진창이라도 유튜브라도 하고 있으니 나름 경험을 써먹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고나서 내 글은 블로그를 쓰고, 브런치를 쓰고,, 직무서를 쓰고 그렇게 지나왔다.

9살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몇 년 쉰 적은 있어도 꾸준히 나는 뭔가를 써왔던 거 같다.

그리고 그 글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내가 쓴 모든 글은 나의 생각이고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직무서치고 잘 읽히고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평가를 들을 때면 내가 여전히 나의 글을 쓰나보다하고 기쁘기도 하다.


시에서 시작해서 소설과 희곡으로 넘어가다가 에세이가 되고 비문학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참 어찌보면 딱딱한 여정인 듯 한데,

그래서 내 마음에는 여전히 문학에 대한 소망이 남아있다.  '기회가 된다면' 쓰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한번은 쓸 생각이다.

그게 소설이든 희곡이든, 뭔가 스토리에 대한 열정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다.


내 모든 경험들이 얼마나 나에게 다 작용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정말 삶의 점들을 이어서 인생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참 진리인 듯 하다.


이렇게 글에 대한 개인의 역사를 쭈욱 되돌리다 보니, 문득 사람들도 그립다.

그 시기에 나의 글의 주제이자 소재가 되고 나의 이야기의 대상이 되던 그 많던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연극을 함께 만들던 그 친구는 스무살이 되던 해에 사고로 하늘의 별이 되었고, 부회장 지은이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방송국에서 날 관리해주던 서연작가님도 검색해봐도 안나오고, 나의 논술선생님도 브런치를 찾아서 훔쳐볼 뿐이다.

커뮤니티에서 글을 나누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연락해서 지내는 친근한 사람들이 꽤 되는데

찾고 싶어도 전혀 소식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가끔은 아이디는 기억나지만 이름도 기억이 안나기도 한다.

그들도 아마 나를 '도그'로만 기억할 것이다. 아, 이때 도그였기에 지금도 도그냥이다.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은 그냥 사진 한장, 잘 살고 있다는 근황 정도만 있어도 해소될 호기심인데 그나마도 보이지 않는 친구들도 많다.

 

추억팔이를 그만해야하는데, 문득 억울한 점이 있다면,

나는 그 때도 지금도 이미준이고 도그냥이라서 내 친구들이 내 안부는 마음만 먹으면 찾아낼 거라는 점.

내 친구들도 날 그리워한다면 그리고 나를 추억한다면 적어도 내 안부는 금방 볼 수 있겠단 생각에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이다.

지나가버린 색이 바랜 관계는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을거고 원하지도 않지만 30여년간 쌓인 과거에 대한 학창시절의 기억은 어쩐지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대도 더 잘 살아올 자신은 없다. 눈물 범벅으로 준비하던 대학 입시나 아픈 아빠를 등에 지고 다급했던 취준생의 기억은 다시 할 자신이 없다.

그저 그 사이사이 내가 흘러올 수 있도록 내가 기댈 어깨를 내어주었던 수많은 인연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할 뿐이다.

 

어제가 생일이었다.

내 삶에 둘러싸인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카톡 리스트를 한참을 보다가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또 언제 또 그렇게 멀어졌나 궁금했다.

그래도 중학생때부터 문학 커뮤니티에서 만난 부산 사는 언니가 말해줬다.

"미준이가 축복이라고 생각해. 모두가 만나고 싶을 때 널 통해서 서로 찾을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억울함은 잊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서 다시 한번 고마워지는 것은, "내가 글쓰는 사람이라는 것."

계속 글을 쓰고 남기자고 다짐하게 되는 하루.


그래도 한번쯤 다시 돌아다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 당시의 나의 행복사랑 때문 아닐까.

추억팔이는 이쯤하고 나의 현재의 사랑과 가족과 직업과 목표에 다시 집중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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