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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그냥 Jan 24. 2023

IT판에도 워킹맘은 있겠지

출산보다 불안한건 나 자신의 성장에 대한 불안이다



신입시절 회사를 둘러 보았을 때 사내에 여자 팀장님이 꽤 있었다.  대기업 중심의 온라인 서비스 회사의 문화라서 마냥 자유롭지도 그렇다고 또 딱딱하지도 않았던 첫 회사에서 나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팀장도 못 될거라는 유리천장은 임원가는 길 정도에서 막혀보여 나름 희망적이었지만 마음은 좋진 않았다.  그 팀장님들 대부분이 이미 나이가 많음에도 미혼이거나 결혼을 했어도 자녀가 없는 딩크였기 때문이다.  더 성장하고 승진을 하는 것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결혼이나 육아는 포기해야하는 건지 궁금했었다.  이미 삼포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  그게 12년전 내가 본 사회의 첫모습이었다.


그렇게 12년이 지난 지금 오늘로 딱 임신 9개월차 32주가 시작된 예비 워킹맘인 나는 지금 병원 천장을 보고 누워있다.  오늘로 6일째.  설명절 기간을 산부인과에서 보내고 있다.  해야할 일은 삼시세끼 잘 먹고 오로지 '눕눕'. 임산부 전문용어로 누워서 버티는 것을 말한다.  이 무슨 태평하고 평화로운 소리냐고 하겠지만 난지금 아직 태어나지 않아야할 아기가 벌써 세상에 나오겠다고 조기 진통이 오는 탓에 조산아로 인큐베이터에 갈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버티는 중이다.  앞으로 정상 출산예정일까지 50일 남짓.  적어도 3주는 밥먹고 화장실갈 때 빼고는 이 자세로 고대로 누워있어야한다.

대체 글은 어떻게 쓰고 있냐고? 손이 닿을 위치에 자바라로 고정시킨 태블릿에 가상 키패드를 띄워서 한 손으로 쓰고 있다. 손목이 약해져서 손목보호대는 필수다.  오랜기간 연마해온 베가 한손 타법을 사람들이 신기해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봐도 경이롭다. 이 환경이 만들어지는데 6일 걸렸다.  와상환자가 되도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이런 임신 이벤트(임산부들은 임신중 문제상황을 이벤트라고 한다)를 겪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대체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30대 후반의 노산이라서인가 아니면 너무 앉아만 있는 근무 환경? 그것도 아니면 문제정의와 의사결정과 소통이 많고 컴터앞에 계속 있는 스트레스와 책임감이 높은 내 직업? 뭐든지 지금 상황의 이유가 될 수 있고 또 전혀 상관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지난 6일간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무리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오랜 시간 일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씩 했다. 이제 아가가 엄마 조금 쉬라고 하는 거라는 멘트가 제일 많았다.  걱정에 대한 감사함과 불안도 잠시.  의문이 하나 들었다.


IT 직종에 일하는 임산부 중 장시간 앉아있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일단 노산부터 짚어보자.  난 왜 노산이 되었냐면 정당한 선택이었다.  난임이 아니었고 그냥 결혼 8년만에 임신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무 경험치가 쌓였고 재택근무라는 제도도 있었기에 더 늦기전에 임신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햇다. 플젝이 많고 이직도 잦은 이 직무에서는 이조차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성장의 욕심은 안정의 욕구보다 높아서 쉽게 출산과 육아로 놓칠 기회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를 기다리다가 지금이었고 이 역시도 바로 생길 줄 모르고 생기면 하늘의 뜻이겠거니하며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아기가 찾아왔다. 그나마 이제는 스스로 납득하고 나아진 환경이기에 시도라도 했던 것. 그게 노산나이가 되어버린 것뿐이다.

 예전 대기업은 밤샘 배포도 있었고 프로젝트 자체보다도 현업에게 개발적인 내용을 설명하거나 임원을 이해시키는 소모적인 과정이 많았었다. 게다가 내가 본 선배들도 임신배려는 없었고 출산후 복직에는 평가피해나 승진 누락이 확실시 됐으며 복직후 아기엄마들은 승진에서 자연히 제외되어 멍하게 시간만 채우다가 퇴사나 월급루팡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슬픈건  스스로 아기엄마가 된 후 이직이나 성장의 가능성을 지레 접어버린 선배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건 사회적인 환경이나 육아때문에 오는 시간 투자 문제 등등 복합적인 결과였겠지만.


두번째 항목인 IT직종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 블로그나 책의 구독자, 수강생도 20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주니어 기획자를 꿈꾸는 친구들이 많다. 이 친구들이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는 시작부터 불안하기 때문이다.  IT업종은 공부해야할 것들이 정보 과다에 가깝게 널려있고 시대는 계속해서 변하고 개인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기본값처럼 여겨진다. 일부 회사는 낮도 밤도 없이 서비스 성공에 목을 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미덕이나 성공사례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예 신격화해서 책으로 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싶을 정도의 노력이나  공부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뒤쳐지고 가치가 떨어질 것만 같다.  그 환경에서 똑같이 이겨내고 해내지 못하면 의지없고 유약한 취급까지 받는단다. 성공할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짬을 내서는 열심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스터디나 독서모임까지 하고 컨퍼런스라도 하나 들어줘야할 것만 같다. 거기다가 나처럼 개인활동이라도 하고 싶다면 바쁘다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이 직무에서는 괴롭다기보다는 성향과 적성에 가깝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니까.


결국 이 바닥 임산부라면 나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스스로와 주변으로부터 내 탓을 하지 않고 운이 나빴다고만 말하기 어려워진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은 결과적일 뿐인데도 말이다.

엄마라는 이름과 뱃속에서 꼬물대는 이 귀여운 생명체를 생각해본다면 마음은 그저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두달 더 일에서 조금 물러난다고 내가 정말 얼마나 도태될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사실 아마도 한두분기의 몇번의 스프린트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눈치채지 못할테지만 이미 길들여진 사회적 습관과 아기에 대한 이제 막 싹트는 책임감과 애정은 우선순위를 쉽게 매기기 어렵다. 건강부터 챙기라고 가정이 중요하다는 타인의 이야기가 모두 당사자가 아니기에 들리는 구호처럼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이 현재 편협해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팩트만 놓고보자면 아기는 여전히 안전하고 난 이런 휴가를 동료들로부터 배려받고 있고 이 상황도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이미 곳곳에서 예비 워킹맘들이 태동을 느끼면서 판교와 강남과 재택으로 일하고 있고 그 시기를 현명히 지나가고 워킹맘이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경력단절이나 유리천장 육아불평등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워킹맘으로서의 성장에 대한 스스로의 불안에 있다


최근 모 기업의 대표가 최고의 보모서비스를 만들면 투자하겠다고 SNS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많은 해석들이 있었지만 과도한 업무적 몰입도를 미덕으로 삼는 그 기업에 시니어급 진입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과 회사가 애초에 양립이 되지 않도록 짜여진 문화는 새로운 진입장벽을 만든다. 하지만 병실에 누워 생각해보니 그 대표의 이야기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예비 워킹맘이 되려는 이들에게는 믿고 맡길 보모가 아니라 나도 아기도 모두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하루 아침에 스쿼드에서 뚝딱 만든 서비스 자랑하는 문화보다 그 사이에서 잠시 떨어져 있다가 돌아와서 그 경험으로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선배와 문화도 필요하다는 거다. 이건 워킹대디나 안식년을 가진 직원들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회사나 사회가 해야하는 일일까? 억지로 만들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지리한 논의가 계속 되어봤자 결국 드는 생각은 이래서 다들 애를 안낳겠다는 결심만 서게할 뿐이니까.

결국 불안한 나에게 필요한건 단 한명의 선배의 케이스다. 인생은 길고 여기 내가 불안에 떨며 누워있을 시간은 길어봤자 한달, 육아하면서 또 성장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시간은 무수히 남았다.

자녀를 다 키우고나서 활동하거나 인생을 일에 바친 사람 말고, 지금 이 순간 나와 같이 아기와 자신의 성장과정을 좌충우돌하며 꽤 쓸만하게 보여줄 사람을 꿈꿔본다.


그게 내가 2023년에 바라는 진정한 순산이 아닐까.



덧. 나도 믿기지가 않는 누워서 쓰는 태블릿 모습.

왜 키보드 못쓰냐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 임산부라 배위에 둘 수가 없어요..그리고 지금 자궁수축방지제를 맞고 있는데 부작용이 심박수증가와 호흡곤란일 수 있어서 가슴위에 둘 수도 없답니다..

퉁퉁 부은 손가락과 BGM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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