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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민 Salawriter Feb 17. 2019

한 집안 가장의 일본 유학 성공기

꿈을 향한 첫걸음의 순간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아무리 용써도 해결이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은, 우리가 깨어 있는 순간에도 종종 벌어진다. 특히나 어려운 목표에 도전하는 과정에는 이런 상황이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에서 맛 본 실패의 쓴맛을 많이 기억할수록 훗날의 성공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은 강할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뜨거운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10년도 더 지난 어느 가을날을 떠올려 본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대학교 3학년. 모두가 곧 다가올 졸업 후를 고민하고 준비하고 있을 때, 나도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계획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추석에 마주한 아버지의 질문을 계기로 나의 계획은 확고해졌다.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거니?"
"동경대학으로 유학 가려고요."


해외 유학. 대학원 진학. 다수의 동기들이 생각하고 있던 취업이라는 현실적이었던 진로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는 있었다. 학교라는 익숙한 곳에서 나와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는 사회라는 낯선 곳에 발을 내디디려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마련일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고, 그래서 계속 학생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학생이긴 하지만 더 큰 무대로 나를 옮겨 놓고 싶은 마음도 강렬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해외 유학이라는 것도 마음만 먹는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유학을 떠나면서까지 부모님께 의지할 수는 없었으니, 곧 경제적인 문제라는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장벽을 넘을 수 있는 해답을 찾았으니, 바로 일본 정부가 해외 유학생에게 제공하는 장학금 제도였다.


시험으로 1년에 50명가량, 이공계는 20명 정도를 선발한다고 했다. 전국에서 소위 일본통들이 몰려들 게 뻔하고, 그 수많은 사람들 중 20명 안에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늦깎이 유학 준비생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시험 준비생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자라, 일본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과연 나의 도전이 가당하기나 한지에 대한 의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마치 올림픽 장거리 달리기에서 몇 바퀴를 늦게 출발하는 아마추어 선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고 일본어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아는 것이라고는 가끔씩 일본어반에 놀러 가서 한 마디씩 주워들은 것뿐이었다. 제대로 된 공부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시작했다.


과정이 쉽고 성공도 쉽다면 도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벼운 '시도' 정도가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그야말로 도전이 시작되었다. 몇 바퀴 늦더라도 완주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단 뛰어보기로 했다. 대신, 페이스 조절이란 것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 질주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시험까지 남은 몇 개월 동안, 학교 도서관의 아침을 밝히고 밤을 마무리했다. 하루에 암기한 한자만 백 개가 넘었다. 그렇게 매일 16시간을 전력 질주한 결과는, 안타깝게도 불합격이었다. 그리고 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여전히 취업에서는 도피하면서 나의 신분은 유학 준비생이고자 했다. 그러면서 현실과 일부 타협하려 했던 선택이었다. 시간은 빨리 흘러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식구들을 안정적으로 먹여 살리고 싶은 가장으로서의 마음의 짐을 진 채로.


시험은 산 넘어 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차에 합격했다. 부랴부랴 2차 시험을 준비했고, 또 합격했다. 3차 서류 전형도 합격, 그리고 면접시험 결과 최종 합격.


믿기가 힘들어 합격자 명단과 수험 번호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두웠던 도서관의 불을 밝히던 날들, 가족과 지인들의 응원과 걱정, 보이지 않았던 나의 앞날에 속앓이 했던 그 많은 순간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머릿속을 꽉 채운 듯했다. 아내에게, 부모님들에게 전화를 하는 내내 나는 울고 있었다. 전화 너머로 환호를 지르며 주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 합격이야 말로 도전의 시작이었다. 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고,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유학을 하는 사이에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고, 장학금과 많지 않은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알뜰해야만 하는 타국에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다행히 유학 과정은 성공적이었고. 석사 2년, 박사 3년 만에 학위를 얻을 수 있었다.


학위 취득 후 귀국해서 사회인으로서의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도전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던 그 감동의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쏟았던 노력과 정성을 떠올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로 게재된 글입니다.

http://omn.kr/1hd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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