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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06. 2021

그 해 여름, 키쿠치(菊池)에서

- 내 젊은, 여름 날의 기억

그것은 한 마리의 순수한 유인원이었다. 우리는 저녁식사 후 산토리 맥주를 한 캔 씩 나눠 마시고 흥이 슬슬 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에 취해 서로 마주 보며 몸을 흔들다 보니 우리들 가운데 둥근 원이 만들어졌다. 한 명씩 자연스레 원 안에 들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YOSHI의 차례가 오자 갑자기 그가 몸을 낮춰 바닥에 웅크렸다. 그리곤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박자와 동작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무릇 춤이란 상승과 발산의 작용이며, 팔과 다리를 이용해 몸을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해야 한다는 견고한 상식이 무참히 깨졌다. 인류가 막 직립보행을 시작하려던 태고 시절, 아직 야생성을 상실하기 이전 신성한 춤의 원형을 목격한 듯 전율이 왔다. 가히 충격적인 그 모습에 친구들 모두 배를 부여잡고 깔깔댔지만, 난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 난 그에게 반해버렸다.


아프리카 어느 외딴 부족의 춤이라고 저럴까, 아마존 깊이 고립된 어느 부족의 춤이라고 저럴까. 자신의 원시적 영혼이 이끄는 대로, 사회적 규범이 결박시킨 몸을 과감히 풀어헤친 그 동작들에 난 해방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남의 춤을 흉내 내지 않는 대범함, 인류의 상식을 초월한 비범함이 너무 멋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오래전부터 춤을 좋아했다. 어릴 적 올림픽 시즌이면 유일하게 챙기던 경기가 늦은 밤 엄마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켜보던 피겨스케이팅이었고, 시골 할머니 회갑잔치 때 밴드 라이브 음악에 맞춰 동네 어르신들과 춤을 추다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동생들과 함께 TV 속 댄스그룹을 흉내 내며 놀았고, 고등학교 땐 하숙집에 친구들을 데려가 불을 끄고 라디오를 크게 튼 채 막춤을 추곤 했다. 신나게 춤을 추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 이런 것이 샤먼들이 말하는 트랜스 상태인가’ 감탄하기도 했다. 당연히 영화 <빌리 엘리어트>나 만화 <스바루>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내 태고의 춤을 잃어버렸다. 정교하고 우아하고 섹시하고 테크닉 한 춤들에 이미 영혼을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였나. 모두가 원형을 상실한 시대에 자신만의 순수를 굳건히 지키며 사는 그가 너무나 특별하고 빛나 보였던 것은. 삼 년 간 머리를 감지 않았다던 그는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말 꼬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끄트머리 뭉치를 갈라 보이며 그 속에 재작년 다녀온 오키나와 해변의 모래가 숨어있다고 말하던 그가, 참 좋았다. 친구들이 지저분하다고 손사래 치며 자지러져도 내 눈엔 그저 그가 기무라 타쿠야이고 오다기리 죠였다.   


그 이후 십 수년이 흘렀지만 두 번 다시 그 같이 경이로움을 안겨준 춤은 없었다. 몇 해 전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해변에서 옷을 훌훌 벗고 짐승처럼 뛰어다니며 춤추던 조르바를 만났을 때, 영화 <버닝>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다 자연스레 웃옷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던 해미를 목격했을 때, 다시금 그가 떠올라 그리워졌을 뿐이다. 


그래선지 요즘 나는 난생처음 춤을 춘다는 이들의 서툰 몸동작이 좋다. 제대로 박자를 맞추는 법도, 절묘히 그루브를 타는 법도 모르는 신생아 같은 그 춤이 좋다. 아직 세상의 어떤 잣대도 갖다 대 본 적 없는 그 춤들은 조금 요상하고 종종 우습지만 묘하게 귀엽고 사랑스럽다. 대지를 네 발로 힘차게 달리던 야생의 본연함이 수줍게 남아있는, 문명사회 타인의 시선에 잠식당하기 전 영혼의 순수가 살아있는 그런 춤을 오늘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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