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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25. 2021

[어슬렁,남해]19.열여드레만의 반가운 고독

밀린 일기와 그리움의 엽서, 매혹의 미니 단호박/ <카페 꽃내>에서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기고, 낯선 장소에 찾아가길 좋아하지만, 그래도 혼자일 때가 가장 충만하다. 꽤 오래전 학창 시절부터 토, 일요일 중 하루는 무조건 나 홀로 방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연애가 한창 불붙었을 때도 주말 중 하루는 꼭 혼자 있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과 함께라도, 매 시간이 즐거워도, 혼자만의 시간이 없으면 왠지 내가 자꾸 희석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드디어, 18일 만의 반가운 고독. 남해에 내려온 이후 매일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종일 살러* 친구들과 붙어 지냈다. 하는 일도, 살아온 시간도, 지난 삶의 경로도 모두 다른 다채로운 사람들. 쉬이 편견을 갖지 않도록 나이와 직업을 비밀로 했던 탓에 처음 1-2주는 서로를 살피고 헤아리는 탐색의 기간을 보내느라, 이후로는 각자 품은 이야기와 색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언제나 끼리끼리 뭉쳐 있었다. 


함께 있으면 너무나 즐거웠기에 대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건,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건, 늘 곁에 머무르려 했다. 마치 다시 대학 새내기가 된 것 마냥, 왁자지껄 하숙집에 되돌아간 것 마냥, 뜨거운 여름 농활을 새로 온 것 마냥, 매일 호기심 넘치고 신나고 역동적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설레 보기도 했다.


내 습성과 체력을 망각한 채, 익숙한 일상의 속도와 자체 소등 시각을 초월한 채, 야심하도록 깡으로 버티며 놀았다. 무한한 흥을 연료 삼아 쉼 없이 자가발전하다 보니 계속 들뜬 상태가 지속됐다. 마치 마라토너들이 러너스 하이에 다다르듯, 그야말로 '살러스 하이(Saler's High)'에 도달한 느낌. 이러다가는 내향성에 중심을 둔 내 삶의 균형마저 흔들릴 것 같았다. 이쯤에서 잠시 스스로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히 점심을 먹고, 목적지 없이 나 홀로 꽃내 중심가까지 걸었다. 개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세련된 <카페 오시다> 대신, 그 옆의 지붕 낮고 소박한 <카페 꽃내>로 들어섰다. 카페엔 손님 두 명, 흰 고양이 두 마리가 전부였다. 특별할 것 없이 적당히 촌스러운 인테리어가 되려 편안하고, 구석구석 성실하게 관리된 흔적은 오랜 애정이 느껴졌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앞 뒤로 열어둔 문 사이로 맞바람이 들어와 덥지 않았다. 오디오에서 이승철의 옛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간간히 주민 분들이 오고 갔다. 


밀린 일기를 차분하게 정리하고, 남해에서 떠올린 옛 벗들에게 엽서를 썼다. 언제 부칠지 모를 편지, 어쩌면 영영 부치지 못할 마음. 이젠 소식조차 끊겨버린 누군가도 있고, 너무 뒤늦은 회신이 미안해서 자꾸만 미뤄진 답장도 있고, 너무 수줍어서 세상에 내놓지 못한 고백들도 있다. 맘 속으로 몇 번이나 단어를 고르고, 한 글자씩 정성껏 눌러쓰고서도 결국 보내지 못했던 숱한 편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 속에서 정갈하고 영롱한 마음이 샘솟을 때면 매번 누군가에게 서신을 띄우고 싶어 진다. 그저 지금 여기 피어난 맑고 고운 그리움을 지구 어느 귀퉁이에라도 새겨두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카페에 머문 시간이 제법 흐르자 사장님이 갓 구운 미니 단호박을 내주셨다. 남해 특산물이라던 미니 단호박을 이곳에서 맛보게 될 줄은 몰랐다. "통째로 구웠더니 저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아서요" 호의를 받는 이의 부담마저 덜어주는 사려 깊은 말 한마디. 이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그 순간 결심했다, 그래, 이제 내 고독의 장소는 이곳이다!


사려 깊은 말 한마디로 반하게 하고, 내 고독의 장소를 결정 지은 매혹의 단호박 ©류


* 살러(Saler): 남해군 지원으로 <6주 살러, 남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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