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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Aug 26. 2021

[어슬렁,남해]20.이렇게 빠를 것 까진 없었는데

신속한 택배에 감탄하다 문득 세상의 속도가 낯설어졌다.

드디어 나도 노트북이 생겼다. 갑자기 또 부자가 된 듯한 느낌, 열세였던 게임에서 만능 무기를 득템 한 기분이다. 그간 회의나 워크숍 때마다 노트북도 패드도 아닌 그냥 노트(공책)를 들고 다니느라 불편했고, 핸드폰마저 액정에 금이 간 후에는 다 함께 사용하는 협업 툴 Notion 조차 접속하기 어려워 곤란한 터였다. 결국 집에 연락해 배송 도중 파손되어도 상관없으니 제발 노트북을 부쳐달라고 사정했다.


오, 이게 웬일인가. 어제 아침 9시에 서울에서 발송했는데, 오늘 오후 곧바로 남해에서 수령했다. 우리나라 택배 시스템은 정말 대단하구나! 경이로운 속도, 완벽에 가까운 정확성, 부담 없는 요금까지.


그런데 문득 이 편리함이 낯설다. 물론 신속배달이야 언제든 고맙지만, 새삼 궁금해진다. 내 손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까. 부지런하고 성실한 누군가의 땀이 얼마나 많이 담겼을까. 사실 나에겐 이렇게 빠를 필요까진 없었는데... 


점점 빠르고 편리해지는 서비스들을 보면 감탄하면서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더욱 세분화되고 체계화되는 시스템의 이면에는 더욱 겹겹이 가려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된 수고로움이 존재하며, 서비스 노동의 효율성이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노동자에겐 일각의 유휴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짤 없는 사회'가 될 것 같은 슬픈 예감 때문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처럼 점심식사 시간을 아끼고, 수면 시간을 줄이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포기하며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봐도, 이미 인간을 초월해버린 시스템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이 되는 건 아닐까.


우린 매일 누군가의 희생에 의지해 산다. 일 년을 공들여 대신 농작물을 길러주는 농부, 가축의 생명을 대신 거두고 살을 발라주는 도축업자, 불 앞에서 대신 연기 마시며 요리해주는 식당 주인, 승객들이 졸며 편히 갈 때 대신 차를 몰아주는 운전기사, 그리고 우리 대신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 물건을 옮겨주는 택배기사까지. 그저 돈을 지불하고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했으니 그만이라고 하기엔 우린 서로에게 너무 기대어 산다. 


각자의 행복을 최소한 희생하면서 서로의 존엄성을 지켜주며 살 수 있는, 인간다운 세상의 속도는 어느 정도일까. 


환호의 언박싱 흔적. 뒤편엔 넓어진 거실에서도 좁은 방 살던 습관을 못 버린 채 여전히 룸메와 꼭 붙어 자는 매트가 사이좋게 누워있다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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