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들끼리만 알고 싶었던 섬, 아이슬란드
대체 그 어디가 얼음섬이란 말인가, 이렇게나 쾌청하고 싱그러운 것을!
Iceland. 이름만 불러봐도 춥고 시린 냉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오는 기분이다. 하얀 눈과 빙하로 뒤덮인 척박한 땅이 연상되는 머나먼 그곳. 하지만 5월에 만난 아이슬란드는 뜻밖에도 제법 온화했다. 오히려 코발트색 바다와 샛노란 등대의 상큼한 보색 대비, 들판에 핀 보랏빛 루핀 꽃의 황홀한 물결, 촉촉한 이끼가 가득 메운 화산지대 틈 사이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꽤나 생기 있는 풍경이었다.
실제로도 아이슬란드의 겨울철 평균기온은 약 1-2°C, 여름철 평균기온은 약 10°C로 이미지에 비해 꽤나 온화한 편이다. 내가 머물렀던 수도 레이캬비크의 경우, 겨울에는 –10°C부터 10°C 사이를, 여름에는 7°C부터 25°C 사이를 오가는데, 따지자면 뉴욕이나 발틱해 근처 나라들보다 오히려 더 따뜻한 셈이다. 이는 아이슬란드 서쪽과 남쪽을 흐르는 멕시코만 난류가 카리브해에서 따뜻한 물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데, 대신 대서양의 따뜻한 기류가 북극의 찬 공기와 만나면서 기상 변화가 잦아 예측불가의 날씨를 선보일 때가 많다. “날씨가 맘에 들지 않으면 5분만 기다려라”라는 아이슬란더들의 농담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꽤나 자주 인용된다.
그래서 나는 외출할 때마다 늘 가방 속에 스카프와 경량패딩(혹은 바람막이 점퍼)을 넣고 다녔다. 마치 동화 <바람과 태양> 속 장면처럼, 햇빛 쨍쨍하다가도 느닷없이 쌀쌀맞고 차갑게 돌변하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근교 나들이나 링로드 투어라도 가는 날이라면 한국에서 챙겨 온 보온속옷을 모조리 껴입고, 레인코트와 털모자까지 추가로 챙겼다. 화창한 날씨만 믿고 룰루랄라 가뿐하게 떠났다가 갑작스러운 비바람을 만나 ‘저체온증'의 공포를 실감한 뒤 생긴 습관이었다.
물론 국토의 10%가 빙하로 덮여 있다지만, 용암지대 덕분에 온천도 꽤 많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제법 살만하며, 평균 기온도 생각보다 높은데... 그렇다면 당최 이 노골적이고도 무시무시한 이름 ‘Iceland’는 어떻게 붙여진 걸까? 바로 ‘본 대로 명명하는’ 바이킹들의 전통적인 네이밍 관습 때문이다.
기록 상 아이슬란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9세기 중엽 나도드라는 노르웨이인이었다. 페로제도를 찾으려다 길을 잃고 아이슬란드에 다다른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파른 산에 올라갔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봐도 불 피우는 연기 같은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빙상과 얼어붙은 들판, 때마침 내리는 폭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을 ‘눈의 나라(Snow land)’라고 칭하고, 고국 노르웨이에 돌아와 섬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9세기 말, 새로운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노르웨이인 플로키가 자신의 가족과 소떼, 정착민들을 데리고 그 '눈의 나라'에 찾아왔다. 때마침 여름이라 백야로 생기가 넘쳤고, 가축들을 먹일 풀과 농장을 지을 자작나무가 주변에 풍성했다. 그는 안도하고 짐을 풀었다. 하지만 곧 찾아온 겨울은 무자비하고 참혹했다. 추위는 온 가축을 앗아갔고, 해빙이 가득 차 버린 바다는 탈출조차 가로막힌 고립 지옥 같았다. 이듬해 얼음이 녹자마자 그는 선원들 대부분을 남겨두고 노르웨이로 돌아와 버렸다. 정착에 실패한 그는 그곳을 가치 없는 땅이라고 전하며 ‘얼음의 땅(Iceland)’이라 불렀다.
하지만 고국에서의 탄압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도망자들의 절박함이나, 자유로운 땅을 꿈꾸는 개척자들의 열망은 무시무시한 이름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로부터 한 두해 후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라는 노르웨이인이 아이슬란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리고 거주하기 양호한 지역을 차츰 발견해가면서 인기 있는 망명지로 입소문 난 덕분에, 50년쯤 지난 후에는 어느덧 인구 1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초기에 비해 과밀해진 환경, 개척자 기질을 지닌 정착민들의 탐험 욕구는 또다시 서쪽으로의 항해를 부추겼다. 그래서 한 세기 훗날 바이킹들은 또 다른 미개척지 '그린란드'에도 정착하게 된다.
'눈의 나라'에서 '얼음의 나라'로 명칭이 바뀐 땅. 세월이 흘러 제법 인구가 늘었다면 자신들의 국가명을 보다 호감 가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었을 만도 한데, 왜 그대로 뒀을까. 혹시라도 너무 좋다고 소문나서 이민자가 더 늘어날까 봐 그랬던 건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식당을 우연히 들렀는데 예상외로 너무나 맛있고 만족스러웠을 때, 소문나면 금세 미어터질 것 같아 꽁꽁 숨겨두고 나만 오고 싶은 그런 경우. 어쩌면 아이슬란드 초기 정착자들의 마음이 그랬을지도. “바이킹이 숨겨둔 천국”이라는 별칭대로 말이다.
아! 반면, 바이킹의 다음 개척지였던 '그린란드'는 이름과 달리 '아이슬란드' 보다 훨씬 더 춥고 척박하다. 아이슬란드에서 폭력범죄에 휘말려 떠나야 했던 붉은 머리 에리크가 함께 개척지로 떠날 사람들을 모집하려고 푸르고 살기 좋은 곳 '그린란드'라고 네이밍 한 후 선전했기 때문이라는데, 성공적인 마케팅 혹은 희대의 사기극이었음은 분명하다. 어쨌든 실제로는 "Iceland=Green, Greenland=Icy"가 더 어울려서, 온라인에선 두 나라의 이름을 뒤바꾸라는 장난스러운 청원도 진행될 정도다.
* 참고자료
- 웹사이트 https://guidetoiceland.is
- 도서 <바다의 늑대(바이킹의 역사)>, 라스 브라운워스 지음, 에코리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