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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Nov 28. 2021

05.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최고령 참가자가 되었다.

최고령 캠퍼의 아이슬란드 Botanical Garden 일상다반사

아... 이제 웬만하면 나이로는 꿀리지 않게 된 걸까. 십오 년 전 일본워크캠프 때는 전 참가자 중 가장 어린 막내였는데, 어느덧 최고령 참가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신청한 워크캠프에는 별도 연령제한이 없었으나, 다른 프로그램들을 대략 훑어봤을 때 만 26, 30, 36세 등으로 최대 연령을 명시한 경우도 많았던 터라 막연히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을 눈앞에서 마주하고 나니 무릎이 탁 풀리는 듯 현타가 왔다. 마치 내가 ‘온 세계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youth의 끝자락’, ‘청년의 마지노선’에 서 있는 ‘청춘 졸업예정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특별 편성된 중장년층 프로그램으로 갈 걸 그랬나, 잠시 짧은 후회가 스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동료 참가자들이 내 나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나 또한 나잇값 못하는 걸로는 자신 있었기에 그럭저럭 잘 어울려 지냈다. 20대들의 체력에 맞춰 노느라 간혹 기진맥진해져 숙소에 드러누운 날엔, 금세 방전되어 버리는 몸뚱이가 서럽고 한스럽긴 했지만.          


나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 있는 식물원의 자원봉사자였다. 식물원 한편에 위치한 자원봉사자 숙소에 머물며 다른 나라에서 온 참가자들과 함께 작업과 일상을 공유했다. 숙소에는 식물원 자원봉사자뿐 아니라, 아이슬란드의 자연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전시하는 ‘사진 마라톤’ 참가자들까지 총 11명이 묵었다. 100년 가까이 된 낡은 목조 건물은 예전에 사냥꾼이 살았다는데, 어느 시절엔가 자살한 사람이 있어 종종 귀신이 출몰한다고도 했다. 지반이 침식되어 살짝 기울어진 집은 발을 디딜 때마다 나무 바닥이 삐걱댔고, 침실이 반지하에 있던 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좁고 가파른 판자 계단을 기다시피 오르내려야 했지만, 해가지지 않는 백야 기간이기도 했고 숙박객이 많아 늘 시끌벅적 한 덕분에 무서움을 느낄 세가 없었다.        


식물원 한켠에 자리 잡은 자원봉사자 숙소. 온 나라의 향신료와 양념이 구비된 주방 풍경은 머물다간 이들의 다양한 국적을 가늠케 했다.  ©류

식물원에서의 일과는 단조롭지만 평온했다. 알람이 울리면 먼저 일어나는 이가 룸메이트를 깨우고, 대충 세수를 마친 후 따뜻한 차 한잔과 과일을 나눠 먹고 숙소를 나선다. 복장은 변화무쌍한 날씨를 대비해 늘 한결 같이 스카프와 티셔츠, 바람막이 점퍼에 등산화다. 아침 8시, 걸어서 2분 거리의 사무소에 도착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직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점심때 먹을 도시락 메뉴를 고른 후, 방수 작업복을 위아래 한 겹씩 더 입으면 작업 준비 완료! 작업 도구는 삽, 갈퀴, 괭이, 선호미, 빗자루, 쓰레받기 중 그날의 기분에 맞춰 선택. 아차차! 작업 능률을 향상해줄 엉덩이 방석은 매일 반드시 챙겨야 할 필수품이다.      


그렇다. 이곳에서의 내 활동은 잡초 뽑기였던 것이다. 식물원에서 북유럽의 식물들을 관찰하며 돌보고, 우아하게 꽃밭을 가꾸는 가드닝을 상상하던 나는, 아니 우리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가드닝’의 개념에 제초도 포함되니 할 말이 없지만, 매일 6시간씩 주구장창 풀매기만 하게 될 줄은 정말 꿈도 못 꿨다. 내 안부를 전해 들은 가족들은 “왜 아이슬란드까지 가서 농활을 하고 있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 시절엔 농활대 작업반장으로서 지치지 않는 풀매기 실력을 자랑하기도 했었고, 언제나 마음 한켠에 귀촌의 꿈을 품고 사는지라 처음엔 나름대로 재밌었다. 단순한 작업이 머리를 비워주는 것 같기도 했고,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노동요와  수다가 즐겁기도 했고, 수고로운 작업 후 깨끗해진 경관을 보면 보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작업은 사흘이 지나자 완벽히 지겨울 뿐이었고, 몇 밤 자고 나면 다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잡초들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 그냥 항복하고 싶어졌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16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대체 뭐하는 짓인지 허탈해지기 일쑤였다. 그나마 매 두 시간 간격으로 티타임과 점심시간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 휴식시간마저 없었다면 치솟는 불만에 단체 태업이라도 돌입할 판이었다.     

영원히 바위를 밀어올려야 했던 시지프스처럼, 우린 매일 또다시 돋아날 잡초를 제거해야 했다. 풀 매기의 인피니티(∞) ©류

하지만 그럴 때마다 헛헛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고개 들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기던 빛나는 정원의 풍경이었다. 평화로운 청둥오리 가족과 난폭한 훼방꾼 거위 가족이 잔디와 연못을 활보하고, 매일 새로운 어린이들이 단체견학을 찾아오고, 볕이 좋은 벤치엔 언제나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며 휴식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 삽과 괭이 곁에는 뒤집힌 흙 속에서 나온 지렁이나 벌레를 쪼아 먹으려는 통통한 참새들이 항상 대기 중이었다. 귀여운 그들을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자 손을 부지런히 놀리다 보면, 마치 영악한 참새 ‘작업반장’의 계략에 넘어간 듯해서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풀매기 작업 속도를 독려하고 재촉하던 귀여운 참새 반장(좌)과 식물원의 무법자 우당탕탕 거위 가족(우) ©류   

1961년에 설립된 식물원(Reykjavík Botanic Garden)은 레이캬비크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공시설로서, 시민의 여가생활뿐 아니라 원예/식물학 연구 및 교육을 위해 3천 종이 넘는 국내외 식물을 보존하는 ‘식물 박물원’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계절마다 운영시간은 조금씩 변동되지만 연중무휴로 매일 운영되며, 매표소도 출입구도 경비원도 따로 없는,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무료 공간이었다. 레이캬비크의 대표적인 여가시설 밀집지역 Laugardalur에 소재해 근처에 바로 종합 스포츠 센터, 축구장, 수영장, 스케이트장, 온천, 동물원 등이 몰려 있어 특히 가족 이용객들이 많았다. 여름 시즌에는 식물원 부대시설인 유리 온실 카페 플로란(Flóran Garden Bistroa)도 오픈하는데, 싱그러운 정원 경관, 맛있는 커피, 뒷마당에서 키운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로 인기가 많아 늘 손님이 북적였다.       

 

여름 시즌에만 오픈하는 까페 플로란의 싱그러운 모습 ©류


아이슬란드에 머무는 3주의 시간 동안 내 대부분의 일상은 이 식물원 안의 군락지 그늘, 통행로 가장자리, 호숫가 잔디 위에서 흘러갔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나는 모든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인 '블루라군'도 가지 않았고, 영화 <인터스텔라>의 얼음 행성 촬영지라는 빙하지대 ‘스비나펠스요쿨’도,  <프로메테우스>의 오프닝을 장식한 무시무시한 폭포 ‘데티포스’도 가지 않았다. 때론 너무 멀었고, 때론 너무 비쌌으며, 오직 관광객들만 가는 곳이라거나, 여름철엔 빙하가 녹아 실망스럽다고 해서 과감히 제쳐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식물원 직원들과 함께 매일 티타임과 점심식사를 즐기며 평범한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고, 현지인들처럼 퇴근 후 매번 동네 온천에 들러 하루의 피로를 풀고, 휴일엔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싸 근교 나들이를 가고, 이름 모를 어느 밴드가 공연한다는 소식에 다 함께 시내 펍으로 달려가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아주 조금씩 아이슬란드를 발견해갔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여행기가 아니다. 그저 매일 캠프 참가자들과 수다를 떨며 주고받은 생각들, 근교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풍경에서 건져 올린 영감들, 무심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질문들, 눈치 없는 나조차도 기어이 알아채고야 말았던 아이슬란드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리 얕고, 가볍고, 짧은 시간의 경험이라도 어딘가엔 반드시 흔적이 남기에. 그저 내 마음의 잔상을 이곳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희미하게 영영 바래져 버리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누군와든 나누고 싶었다. 아이슬란드에 다녀간 이, 다녀갈 이, 혹은 마음속에서 이미 여행 중인 누군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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