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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Oct 21. 2020

서툰 위로보다 침묵이 나을 때

울고 싶을 만큼 울고 떠나보내지 않으면 평생 울게 된다고요

어제 오전 한 친구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어쩌다 시작하게 된 블로그에 올릴 백 스물여섯 번째 글을 쓰느라 바쁜 시간이었어요. 카톡은 거들떠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노트북 오른쪽 귀퉁이에 메시지가 살짝 솟았다 사라지는데 분명 친구의 이름이 뜬 것 같더라고요. 예감이 심상찮았습니다. 한 달 보름쯤 전에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던 친구 엄마의 영면 소식이었어.


- 엄마 아프지 않은 곳으로 가셨어.


아아. 제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어요. 가까스로 몇 개의 문장을 떠올려 봤지만 하나같이 영혼 없는 소리. 답장을 안 보내는 게 가장 좋은 답이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러다 곧 말겠지 싶었던 코로나 좀 어떻게 해 볼 수 없나요? 무자비한 점령군처럼 우리 일상을 훼손시키는 바이러스에 막막함을 느끼는 게 저뿐이겠습니까만은. 문병을 갈 수도 없으니 그동안 사람 노릇 포기하고 무작정 처분만 바라듯 친구의 연락 기다리는 형국이었답니다.


어쩌고 지내는지 걱정이 목까지 차 오를 땐 조심스레 먼저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네요. 친구 마음에 조금도 가 닿지 않을 공허한 문구 같아 떨떠름해하면서도요. 행동은 안 하고 말로만 때우는 일 질색이다 보니 점점 연락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혈소판에 이상이 있어 검사받으러 입원하셨단 얘기만 얼핏 들었을 뿐, 자세한 병명도 모른 채로요.


친구나 저나 처음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병실이 나려면 1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서울대병원에 바로 자리가 난 것만 봐도 행운이라고, 예감이 좋다고 하면서요. 그러니까 이런 한가한 소리도 할 수 있었던 거죠.


"다른 형제들이랑 간병 교대하는 날 언제든 와. 울고 싶은 날, 실컷 울 곳이 필요할 때. 카페 같은 데보다우리 집이 낫겠잖아."


저도 그런 적 있었으니까요. 거의 사십 년이 다 돼가는 20대 초반. 맘 놓고 울 데 하나를 찾지 못해 꾹꾹 울음을 눌러야 했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예상 밖으로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걸 평소와 다른 친구 태도에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정하고 친절한 친구는 제 볼 일부터 보느라 누굴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늘 상대방 입장부터 헤아려 주는 게 몸에 밴 애였거든요.


우스개 소리로 저는 사람을 가를 때 '독립운동을 같이 할 수 있겠다 없겠다'로 표현하곤 하는데요, 친구만 적당한 동지 찾는 것 여간 쉽지 않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상대방의 '내일 언제 볼까?'라는 메시지에 제가 재깍 '12시'라고 답을 보냈다 쳐 볼게요. 그런데 그 다음날 12시가 다 되도록 확인 안 하는 무신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저는 함께 독립운동 못 하겠네~~이럽니다. 접선 장소가 바뀌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럼 독립운동  거니까요.


약속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다가 다 붙잡히라고요? 언제든 분명하고 확실하고 예측이 가능한 사람. 그 점에서 친구와 저처럼 완벽한 파트너도 없단 예를 좀 극단적으로 들긴 했네요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친구의 변화가 겁이 났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어요. 친구 엄마 상태가 그만큼 위급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요.


제 딴엔 단어를 고르고 골라 간신히 보낸 톡을 열어 보지도 않은 채 시간이 흐르길 여러 차례. 그러다 닷새 전쯤 운 좋게 통화가 한 번 이뤄졌는데 도중에 급히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고요. 예삿일이 아닌 걸 깨닫자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코로나가 병문안을 가로막았어도 저는 갔어야 했다고. 병원 입구에서 제지를 받더라도 사람인 이상 문병 가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고 말이에요.


한 고비를 넘겼는지 밤늦은 시각 친구가 전화를 했더군요.

"엄마가 너무 아파하니까… 지켜보기 힘드네. 통증 없는… 곳으로 … 아빠 옆으로… 얼른 가고 싶대. 속상해… 죽겠다."


그 순간 저는 40여 년 전 우리 엄마도 그랬다고, 살인적인 통증과 싸우면서 지상에서의 시간을 연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6남매도 그런 맘이었다고 입을 놀릴 뻔했습니다. 엄마가 고통스러워 하니까 차라리 그만 놔드려야겠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란 입방정을 하마터면요. 친구는 그 순간 저에게 좀 더 희망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하소연을 했을지도 모를 텐데 말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엄마가 나, 찾나 봐!" 친구가 급히 또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번만 더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병원 벤치에서 만나 촌지라도 건네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낯이 뜨겁더라고요. 친구가 저렇게나 경황이 없는데 제 체면부터 차리고 싶어 했던 것,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었다 싶은 겁니다. 제 맘 편하고 싶어한 짓에 다름아니었더라니까요. 


면회는 못하더라도 너라도 잠깐 보러 가야겠어. 그건 곧 제 입장부터 세우고 싶었던 생각, 그걸 은밀히 가슴 속에 품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꿍꿍이었더라고요.


그동안 전 '혼자 잘해주고 상처 받기' 선수였답니다. 요즘에야 블로그 하랴 브런치 하랴 품앗이 댓글 쓰고 답글 달랴 한꺼번에 두 가지도 못던 제가 종일 동동동. 대체 이게 바람직한 변화인지 어떤지도 모른 채 덕분에 누구에게든 상처 받을 시간은커녕 밥도 서서 먹어야 할 만큼 바빠졌다지만 딱 한 명, 이 친구에게만은 예외였나 봅니다. 사람 도리 못하고 있는 제가 마뜩잖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맘이 간절했던 걸 보면요.


그러고는 어제 오전, 친구 엄마의 소천을 알리는 톡을 받기까지 저는 묵묵히 기다렸던 거죠. 제가 사람 도리 못하는 것쯤 뭐 대수겠냐 싶더라고요. 분초를 다퉈가며 엄마 곁을 지켜야 할 친구에게서 소중한 시간을 뺏지 않는 것, 그게 더 친구를 위하는 길인 걸 깨달았기 때문었습니다.

 

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다 큰 뒤에 부모 상을 치르는 친구나 지인에 대해 좀 냉랭한 편입니다.


'난 아주 어린 나이에 겪어낸 일이야. 너흰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남편도 있고 최선을 다해 돌봐야 할 자기만의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겪는데 뭐가 그리 애파서? 내 앞에서 그렇게 슬퍼하는 것, 배려 없고 무신경한 일 아니니?'


이런 말 내뱉은 적 물론 없습니다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원통한 사람저라고 생각해 온 건 부인 못하겠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 되어 겪든 천붕의 아픔은 각기 고유한 것일 텐데, 저에게 그런 뾰족하고 차가운 마음이 숨어 있었더라고요. 거기 예외를 두는 두어 명이 있다면, 이 친구가 대표적이고요.


- 엄마 아프지 않은 곳으로 가셨어.


저는 다시 한번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눈가가 촉촉이 젖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양 꼬리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동안 다 메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  저 열세 음절을 쓰는 동안 친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블로그를 대충 마무리해서 발행한 다음 어제 오후 무작정 집 근처 둘레길을 걸었네요. 아직 완연한 가을빛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누가 태어나든 누가 죽든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구나 생각하며 오래오래 걸었습니다.


- 너 스무 살에 엄마랑 작별했때 어땠을. 상상이 안 가. 나는 이 나이에도 이렇게 힘든데.

친구 엄마가 입원하고 얼마 후 그녀가 보내온 메시지가 다시금 머릿속을 채우더군요. 친구의 전공이 심리 상담인 덕분이었을까요? 함께 울어줄 줄 알고 감정이입을 잘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괜찮은 어른이 된 건요?


말로 표현하지 않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저,  친구에게서 배웠잖아요. 차마 낯간지러워 못하겠어서 묻어둔 말들. 내 맘 다 알겠지 싶어 삼켰던 말들. 츤데레 운운 거들먹거리면서 생략했던 말들. 친구 덕분에 조금씩 끄집어낼 수 있게 됐잖아요.


예민하다는 둥 뒤끝 있다는 둥 저를 형편없는 사람 취급한 지인들에 후달렸다가도  친구 옆에만 있으면 저도 꽤 괜찮은 사람인 듯한 그 기분에 대해, 누구 혹 격하게 공감해 주실 분 있을까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친구 엄마를 애도하며 걷는 동안 친구는 천붕의 슬픔 속에서 까무러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 되더군요. 한 달 넘게 엄마 곁을 지키느라 몸도 마음도 지푸라기가 되었을 텐데요.


유난히 정 많고 눈물 많은 친구에게 만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저는 카톡 하나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상을 가서도 아무 말 못 할 것 같고요. 서툰 위로보다는 침묵이 나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가만가만 함께 울어주다 오려고요.


스무 살에 엄마를 잃고 신산하게 살아온 제 마음부터 살피느라 울음을 는 눈치면 그땐 바로 입을 열어야겠지요. 충분히 맘 놓고 애도해도 된다고요. 울고 싶을 만큼 울고 떠나보내지 않으면 평생을 울게 된다고요. 아직도 울음이 잦아들지 않는 제가 바로 산증인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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