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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Oct 07. 2020

나이를 먹는다는 것

"젊은이랑 어울리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다물어야죠."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이 말을 저는 언제부턴가 만트라처럼 외우며 삽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서 외우는 진언, 만트라 있잖아요.


백화점 문화센터에 다녔단 말씀은 드렸던가요. 첫 발을 디딘 건 2015년 9월 7일이었어요. 주민 번호 앞자리처럼 절로 외워지는 20150907, 아주 뜻깊은 저만의 기념일.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어서 그곳을 저는 일 년만에 떠나게 됩니다.


아쉬워해 주시는 분이 적지 않았지만 유난히 속상해하고 애석해 한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제가 써낸 글마다 가장 조용히 가장 늦게 칭찬해주신 K 선생님.


교수님의 합평이 끝나자마자 시끌벅적 응원해주신 선생님들도 고마웠지만, 또 한 편을 써낸 성취감에 취해 혼술로 저를 위로하는 그 밤, 그제야 카톡을 보내주신 K 선생님 방식 저는 더 끌리더라고요. 즉각 칭찬을 하면 왠지 당신의 마음이 순전하게 전달될 것 같지 않아 미루게 된다셨죠.


유유상종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는 단박에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동류이니까요. 숨차게 빠른 반응은 그 나름대로 상대방에게 일찌감치 마음을 보여 주는 장점도 있겠지만 상대가 한숨 돌릴 즈음 천천히 연락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으니까요.


20150907. 글쓰기 수업에 발 들인 첫 날을 제2의 생일이나 된 듯 여겼다면 좀 더 오래 다니지 그랬냐고요? 물론입니다. 변화가 싫어서라도 한 번 결정하면 뭐든 쉽게 갈아타지 못하는 성격인데 오죽하려고요. 능력만 된다면 언젠간 꼭 쓰고 싶은 소설 같은 사연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오해받는 걸 대수롭잖게 여길 만큼 마음 근육이나 튼튼하다면 또 모르겠네요. 아마 저는 지금도 그 수업이 시시해서 박차고 나간 걸로 알려져 있을 걸요? 전말을 알고 계신, 그래서 제 결정을 납득해 주신 교수님만 빼면요.


마지막 수업을 아쉽게 뒤로 하고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을 때였습니다. 평소와 달리 K 선생님이 이번엔 누구보다 먼저 연락을 주시더군요.

- 밥 한 끼 먹고 헤어집시다. 다음 주 시간 되는 날 중 가장 빠른 날로 골라 보세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선생님과는 냉큼 매치가 안 되게 추진력 있는 문자였어요. 막연히 '언제 밥 한 먹어요'가 아닌 구체적인 날짜 몇 개가 적힌 폰 화면. 코를 박고 쳐다 보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왜 시야가 뿌예지던지요.


일흔이 넘은 선생님도, 쉰 중반인 당시의 저도 그동안 말을 주고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수업 중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고 씩 웃는 사이였거든요. 선생님 제안이 더 뜻밖이었던 건 그래서였을 겁니다.


예약석 창 너머 무역센터 빌딩에 시선을 주고 있을 때 곱디 고운 선생님이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걸어오셨습니다. 5cm만 더 컸어도 미스코리아가 되고 남았을 미모라는 소문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는데, 역시나 그렇더라고요.


"선생님, 오늘은 더 고우시네요."

"자기랑 데이트하는데 그럼, 멋 좀 부려야지."


50여 년 전 남편 분께서 선생님을 보쌈하듯 채 가려고 신림동에서 신촌까지 출근부 도장 찍듯 오셨다더니, 전설 같은 얘기가 괜히 떠돈 게 아니었겠다 싶었습니다. 호호, 손으로 입을 가려가며 수줍게 웃어가며, 선생님은 식사도 어찌나 우아하게 하시던지요. 근사한 선생님과 함께 하는 순간이 이만저만 설렌 게 아니어서 하마터면 저는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답니다.


일 주일에 한 번, 일 년간 한 강의실에서 보냈지만 선생님은 첫 미팅에 나온 사람처럼 자기소개를 했어요. 선생님이랑 제가 얘기를 나눠 본 게 처음이라서 착각하셨겠죠. 선생님 자서전을 통해 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 줄도 모르시고요. 여고 때 문예반이었던 것도, 국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 뜻을 거역 못해 가정대에 진학했던 것도, 맏며느리라서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당신 4남매 키우듯 거두느라 쌀 한 톨 아껴야 했던 것도….


저는 몸을 살짝 기울이고 선생님 눈을 마주한 채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제가 무슨 말만 하면 '한 번만 더 말 했다간 백 번이오, 엄마' 하고 퉁박을 준 아들놈이 순간 왜 떠오르던지요?


새파란 그 녀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 거기에 수반되는 징후 중 총기가 없어지는 증세… 는, 미모가 특출나고 태도가 우아한 선생님도 어쩌지 못한다 싶으니 살짝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그나저나 웬 자서전이냐고요? 수필반 수업에 등록하고 가장 놀란 사실이 그겁니다. 자비로 책을 낸 선생님들이 꽤 많다는 데 충격을 받았거든요. "어, 책 내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어?" 하는 기분과 함께요.


회원이 새로 들어오면 선생님들이 무척 반기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필 서명한 당신들 책을 맘 편히 기증해도 될 대상이 나타난 셈이잖아요.


저에겐 다른 어떤 선물보다 책을 최고여길 줄 아친구가 두 명 있는데요, 그때마다 얘기합니다. 내가 아직 책을 선물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요. 나이가 들면 책을 좋아해도 읽을 수 없어 우울해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돋보기를 써야 읽기가 가능한데 눈이 쉬이 피로해지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책이나 글과 관련된 일을 한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읽겠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가까이 한다? 아,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을 주는 일이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법이고요.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팔리지도 않을 자서전을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 아무에게나 건네긴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러니 수필반 선생님들도 자서전 1천 부를 다 소화하기가 요원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골방에 쟁여두고 계시다가 저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 회원이 들어오면 줄줄이 책을 주신 건 그런 사정 때문었을 겁니다.


작품 하나하나, 나름 뼈를 갈아 쓴 자신의 수필집을 글쓰기가 얼마큼 힘든지 아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니까요. 냄비 받침으로 쓸지도 모를, 아파트 통로에서 만난 이웃에게 책을 건네는 것보다는 백 배 안심이니까요.


저와 동류인, 수줍음이 많고 늘 엉덩이를 뒤로 쑥 빼는 듯한 K 선생님께 더 마음이 갔던 건 그분이 미안해하며 당신 자서전을 주셨기 때문이었어요. 처치 곤란인 골칫덩이를 떠 안기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셨던 모습. 그러지 말았더라면 좋았정도로 선생님 글은 맑풋풋하고 따뜻했는데 말이에요.


"저, 이 수업 왜 관두고 나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선생님?"


후식으로 레몬티와 아메리카노가 나오길 기다릴 때였어요. 선생님도 저도 이 만남을 죽 이어 나갈 만큼 적극적인 타입이 아니다 싶으니 불쑥 욕심이 생기더군요. 오해받은 채 작별하기 싫다는. 적어도 선생님께만은 이해받고 헤어지고 싶은 욕심. 제 입에서 기어이 그 말이 나온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궁금하지 않아요. 그럴 만하니 그랬겠지요. 나이와 분별력이 비례하진 않지만, 우리 같은 늙은이 젊은 사람들보다 산 세월이 잖아요?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을 겪어 봤다강점이라면 강점이죠. 글과 사람 반드시 같은 건 아니지만, ○○○ 씨 글 그동안 17편이나 읽어 봤구요. 대답이 됐나요?"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저는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을 선생님 앞으로 내밀었어요. 그건 선생님이 그날 사 주신 점심을 찍소리 않고 감사히 받겠단 암시나 마찬가지인 셈이었죠.


잠깐 마음이 불편했지만 견딜 만하더군요. 제 방식이 무조건 다 옳다고 믿었을 때 같았으면 화장실 가는 척 몰래 계산을 해 버렸을 저였으니까요.


누군가 저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려는 순간 저는 코 끝이 찡하도록 감격합니다. 그랬다가도 정작 받으려면 몹시 힘이 드는 이율배반에서 언제쯤 자유로워질는지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그날은 잘 견뎌냈답니다. 내 맘 편하자고 상대방 성의를 물리쳐 버리는 짓에서 말이에요.


나이를 먹으니 깨닫기 시작한 거겠죠. 상대를 위한다고 믿었던 일이 결국 내 맘 편하고 싶어 선수 친 일이었다는 것을요. 내 맘은 좀 거북하더라도 상대방 마음 먼저 헤아리고 받아주는 게 더 큰 대접이라는 것을요. 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받는 일 또한 퍽 중요하다는 것도요.


맘 편히 받기보단 나눠야 할 곳이 더 많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막상 K 선생님이 지갑을 여는 걸 지켜보려니 송구해서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더라고요.


강남에 아파트가 있고 자녀분들이 잘 되었다 해서 아무나에게 시간과 마음을 넘치게 내주시진 않을 거잖아요. 역시나 제 마음을 알아차린 선생님이 겸연쩍게 웃으며 입을 여시더군요.


○○○ 씨, 젊은 친구하고 놀려면 우리 같은 늙은이는 지갑을 열어야 해요.
젊은이들이 우리를 상대해 주는 것만도 어딘데.
그리고 ○○○ 씨, 앞으로도 글 쓰는 일 절대 놓으면 안 되는 것, 알죠?


가까운 지하철 역에 저를 떨궈준 선생님의 자동차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저는 만트라를 외웠습니다. 선생님처럼 우아하고 푸근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보다는 지갑부터 열 줄 아는 꽤 괜찮은 어른이 되기를 소망한다고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전화든 문자든 먼저 해주길 바라는 분들이 제 주위엔 많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데, 눈이 오면 눈이 오는데 왜 연락을 안 하냐고, 은근히 보채는 소녀 같은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K 선생님 생각을 합니다. 그날 이후 몇 년째 연락 안 하고 있지만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면 매선생님 고운 얼굴이 떠오르는 걸 알기나 하실까요? 연락이 없긴 선생님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시나 그분도 제 생각을 이따금 하시긴 하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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