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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구나 Aug 09. 2020

나의 숨쉬기, 나의 글쓰기

"측간에 단청하지 마세요!"


어제 쓴 글을 오늘 새벽 깨자마자 죽죽 그었다. 원고지 같았으면 너덜너덜하다 못해 찢어질 정도로. 가장 거슬리는 건 부사를 남발하는 내 못된 글쓰기 버릇이다. '나, 슬퍼'와 '나, 너무너무 슬퍼'는 맛이 확 다른 걸 어쩌라고! 어쩌라고! 외치고 싶지만 도가 지나치게 부사를 사랑하는 걸 나는 안다. 쓸데없이 예민해서 슬픈 일이 있을 때면 '그냥' 슬프기만 한 적은 '결코' 없고, '너무너무' '매우 매우' 슬퍼서 부사를 '마구' 쓰고 싶어지는 게 내 성정일지라도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글을 쓰고 싶었다. 여고 졸업 때까지 문예반 근처엔 얼씬한 적도 없으니 그땐 아니었겠다. 운동장 조회 때 백일장에서 상을 받는 친구가 멋져 보이긴 했다. 특별한 걔네 세계이지 내 길은 아니라고 여겼다. 수학 책 밑에 <백경>과 <달과 6펜스>를 숨겨놓고 야금야금 아껴 읽는 짝꿍이 신기했지만, 나는 영단어 하나 더 외우는 쪽을 택했다.


언제부터인지 내 삶이 막막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고 싶은 말이 부글부글 괴어올랐다. 대학 4년 내내 공부는 뒷전인 채 고 3 담임선생님께 편지만 써댔다.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만큼 예쁘고 귀티 나는 부잣집 애들이 원어민 뺨치는 영어를 구사하는 게 무서워 죽겠다고, 휴학을 안 하면 곧 죽을 것 같다고.


누가 봐도 지방 사범대를 갔으면 좋았을 집안 형편이었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탈출하고 싶어 했던 사춘기가 주범이었다. 학교 실적을 올리기 위해 서울로 원서를 써 준 선생님은 종범이었다. 나와 공모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기꺼이 샌드백이 되기로 결심했는지 선생님의 답장이 속속 도착했다. 실력은 없고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 지방 소도시 촌년이 서울의 혹한을 네 차례나 버텨낸 이유였다.


출판사 공채에 합격한 건 그 '편지질' 덕분이었는지 모르겠다. 일기는커녕 노트 필기나 메모도 귀찮아했던 내가 그렇게 많은 글을 써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광화문 뒷골목이 떠나가도록 술자리가 잦았던 수습기자 시절 사립학교 교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함께 교직 이수를 했던 과 친구들은 냉큼 학교를 선택했다. 무슨 고민거리가 되기나 하냐는 듯.


그럴 거면 애초 사범대를 갔겠지, 외골수인 나는 한 줌 동요가 없었다. 빨간 사인펜으로 번역 원고를 슥슥 삭삭 윤색하는 일이 신나고 신기하기만 했다. 내 손 끝이 조금 더 윤나는 문장을 빚어낼수록 나는 나다워져 갔다. 해야만 하는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한 시간이었다. 연탄불을 땔 수 없는 초라한 자취방은 잊히고, 고르고 편안한 숨을 쉬며 나에게만 집중한 시간이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적은 월급을 쪼개 등록금을 대준 큰오빠와 올케 언니를 향한 미안함은 잠시 내려놓은 채.


맞벌이가 대세는 아닌 시절이었다. 이력으로 내세우기도 어중간한 출판사 3년 근무를 끝으로 나 지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글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쪼그라들었다. 세 살 터울 남매가 내 손을 필요로 하는 게 더 시급했다. 글과 완전히 분리되고 싶지만은 않내 안의 은밀한 소망을 지그시 밟았다. 글은 특별한 사람이나 쓰는 거고, 나는 아니라고.


나를 죽이지 않고는 성립이 불가능한 결혼 생활이라는 것. 그런데생각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많아 머릿속이 늘 어지러웠다. '다독'과 '다작'은 어림없지만 '다상량' 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릴 것 같지 않을 것처럼. 소심해서 미리 하지 않아도 될 걱정으로 잠을 설쳤고, 오해 받거나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려면 매 순간 생각이라는 걸 안 할 수가 없었다.


글로 옮겨 쓰지는 않으면서 자나 깨나 마음 속에서 문장을 만들기 바빴다. 누군가 애먼소리를 할 때 당하고만 있었던 장면을 복기하면, 상대를 때려눕힐 수 있는 말이 그제야 통쾌하게 떠올랐다. 생각 속에서만큼은 버벅거리지 않았고, 생각 속에서만큼은 지지 않았다. 무럭무럭 생각이 자라자, 문장을 만드는 속도도 빨라졌다. 더 이상 내 맘 깊은 곳에 문장을 쌓아둘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허섭쓰레기 같은 얘길 글로 방출해도 될까, 망설이던 중 조지 오웰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 <왜 나는 쓰는가 WHY I WRITE >에서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 그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혼내주려고, 세상에 일러바치기 위해 글을 썼다고. 그렇다 하더라도 글쓰기 강좌 등록까진 자신 없었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한 것보다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일 성싶었다.  


내 손을 놓치면 무섭게 울어젖혔던 아이들이 더는 손을 잡지 않게 됐을 즈음이었다. 20여 년의 지방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2015년 어느 날, 강남 한 백화점에서 대학 동창이랑 문화센터 앞을 지난 게 화근이었다. 분기당 12 만원.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이런 돈을 써도 될까. 망설이고 있을 때 친구가 채근했다.


"너 글쓰기에 관심 있는 거 눈치채고 있었어. 한 달에 4만 원, 너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줘? 너한테는 네가 그만큼인 거야?"


사는 동안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그때 그 순간 내 옆에 그가 없었더라면 참 아찔하다 싶어지는 은인 중 한 사람. 그 친구의 권유 아니었으면 게으르고 겁 많은 내가 글쓰기 동네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까? 내 글에 융단 폭격을 퍼부어 준 문화센터 지도 교수님도 그러니까 친구 덕택에 만난 은인인 셈이었다.


중학교 국어책에도 글이 실릴 만큼 유명한 그분은 깐깐하고 소신이 강했다. 칭찬을 아꼈고, 수강생이 떨어져 나갈까 봐 대충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한 얘기를 또 해서 삼천포로 빠질 때를 제외하면, 지방에서 오래 사느라 그런 문화에 처음 젖어본 나는 원빈보다 소지섭보다 교수님이 좋았다. 이름 있는 소설가에게 배우다니, 그것만으로도 황홀해서 그림자도 안 밟고 멀찌감치 피해 다녔다. 수업 후 백화점 식당가에서 식을 할 때 한 마디라도 얻고 싶어 교수님 가까이 앉고 싶은 맘 굴뚝 같았지만.


등록한 지 두 달 동안은 관망만 했다. 그 사이 파악한 건 두어 가지였다. 재수강률이 높은 인기 강좌이긴 하나, 십 년 넘게 동창회 참석하듯 오시는 어르신들이 교수님께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 한때는 문학 소녀였음직한 고운 할머니 선생님들은 칭찬이 고팠던 거다. 50 중반인 내가 햇병아리 축에 낄 정도로 연령층이 높다 보니 호칭은 자연스레 선생님으로 통일했다. 학교 선생 되는 일도 마다한 채 출판사 밥을 먹었던 나도 박 선생으로 불렸다.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글 동네에서 미루다 미루다 첫 작품을 낸 날, 퀭한 눈에 핏발이 선 채 강의실로 향했다. 합평이 시작됐고, 잠시 후 선생님들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끄덕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분은 나를 향해 V자를 그려 보이시기도 했다.'스테이크에 물릴 대로 물렸는데 짭조름한 냉이 된장뚝배기 같은 글이 '뜬금포'처럼 나타났군.' 그날 내 첫 글을 교수님이 칭찬해주 건 아마도 그런 연유는 아니었을지. 


그간 강의 시간 내내 교수님이 강조 걸 유념하긴 했던 성싶다. 다 말하려고 하지 마라. 만 아는 내용 만 알게 쓰지 마라. 설명이 많으면 글이 늘어진다, 묘사를 늘려라. 짧게 끊어서 써라. 또 뭐였더라. 아, 반전! 그러고 보니 반전에 신경을 좀 썼던 것 같고, 교수님도 그 점을 특별히 인정해 주셨다. 처음부터 다 말하지 말고, 계속 궁금증을 일으키다 막판에 반전이 있게. 선생님이 하라시는 대로 시늉을 내다가 소 발에 쥐 잡은 격이었다.


얼굴이 홧홧해져 고개를 수그렸다. 속으론 칭찬을 원했으면서 막상 들으면 반납하고 싶어지는 건 무슨 조홧속인지. 여러 선생님들이 어떤 심산으로 그 수업에 나오는 줄 알기에 송구해서 더 그랬을 터였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걸 불편해하고 칭찬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못난이 기질이 그날 또 발동한 건.


 나는 어르신들 눈에 날까 봐 더 조심하며 문화센터를 들락거렸다. 삼십 년 넘도록 많은 책을 쓴 소설가에게 칭찬 받았다는 수줍은 기쁨은 잠시, 얼마 안 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날 줄도 모른 채.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죽을힘을 다해 썼다. 글을 빨리, 잘, 못 쓰니까 남들보다 품을 더 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봤던 모습 그대로, 밤 늦게 귀가할 때까지 노트북 앞에 붙박혀 있는 나를 보 딸아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엄마 그러다 죽을라."

"그러게. 니 엄마 죽겠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학력고사 전국 수석 했을라."


A4 두 장짜리 에세이 한 편 쓰는 데 어림잡아 100 시간은 들이지 않았을까. 입속말로 읽어보고, 소리내어 읽어보고, 일부러 술을 마시면서 읽어보고, 종이에 출력한 상태로 읽어보고. 독자가 뭐얏? 하며 글을 집어던지는 일만은 없도록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러다 급기야 글을 읽어줄 후배를 찾아냈다. 조선시대 간서치 이덕무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책을 많이 읽는 애였다.


"세 번쯤 읽으니까 겨우 이해가 가네요."

후배의 말이 못내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찍소리 않고 따랐던 건, 걔가 지적해 준 부분을 고치면 글이 한결 좋아지더라는 것. 내가 미처 못 본 걸 후배가 짚어주었으니 밥을 사줘도 몇 번은 사줄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 교수님께 제출할 때면 원고를 다 외울 지경이었다. 내 딴엔 죽을힘을 다해도 교수님이 칭찬을 해준 적은 그닥 없었지만, 나는 비로소 온몸에 피가 돌고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퇴고를 할수록, 쓰레기 같은 초고 땟국물이 빠질수록, 못나도 조금씩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내 글에 그 정도 공을 들이지 않곤 글도 나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첫 합평 때 들었던 짧은 칭찬이 혹 꿈결은 아니었던가 싶게 그후 교수님은 내 글에 별로 언급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박 선생, 측간에 단청하지 마세요!"


무슨 소린가 싶었다. 네? 라고 되묻기도 조심스러워 다음 말을 기다렸더니 목덜미까지 벌게진 그분, 내 원고 위에 지휘봉을 탁탁 쳐대면서 잔인하게 보탰다.

"박 선생님! 수식어 다 빼라고요. 특히 부사! 변소 간에 분칠 한다고 변소가 변소 아닌 게 됩니까!"




다 쓴 글을 반 이상 버린 오늘 새벽 같은 날엔, 4년 전 그곳을 떠나올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교수님 모습이 떠오른다. 혼비백산, 눈물이 쏙 빠질 뻔했던 그날, 꾸지람 뒤에 숨겨 놓은 보석 같은 가르침을 내 몫으로 만들지 말지는 나에게 달린 일이었다.


원빈보다 소지섭보다 좋아서 그림자도 밟고 싶지 않았던 그분께 배운 대로 나는 한 문장에 몇 개씩 박힌 부사를 덜어낸다. 퍽, 아주, 정말, 너무나, 무척, 도무지, 그토록, 당최… 아, 못 말릴 나의 부사 사랑이여. 다 덜어내기 아까우니 몇 개쯤은 남겨 둘까. 교수님 애제자 될 욕심까진 없으니 '아무래도' '몰래' '살짝' '조금' '더' 부사를 쓸까 보다. 수식어를 덜어낼수록 글이 정갈하고 쫀쫀해진다는 건 이제야 나도 깨닫게 되었지만. 그 말씀이 진리인 건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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