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는 맥주로 유명하다? 체코 와인 축제 방문기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독일 트리어에서 프라하로 오기까지 9시간 30분이 걸렸는데, 기억은 불과 예닐곱 장의 정적인 이미지만 남겨놓았다. 그나마 그 가운데서 딱 하나만이 오늘보다 긴 목숨을 부여받는다. 사실 나를 프라하까지 오게 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체코가 와인으로 유명한 국가는 아니지만, 프라하라 불라는 곳에서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했다. 마스다 미리가 말했듯,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체코 와인 축제의 한 복판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보통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복권이라던가 경품 추첨 같은 것은 당첨돼 본 역사가 없다. 연금 복권 천 원짜리 한 번 되어 본 것 같은데, 그나마도 찾아가지 않아서 기한이 만료되었다. 하지만 여행할 때만큼은 참 행운이 따랐다. 와인 축제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나에게 한국의 지인이 '체코 멜니크(Melnike) 와인 축제 보러 간 거야?'라고 물었다. 구글링 해보니까 나왔다면서... 이를 알려준 그에게 정말 무한 감사를 보낸다.
사실 체코는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는 아니다. 나 또한 체코 와인을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었다. 하지만 멜니크는 9세기경부터 와인을 양조한, 역사가 오래된 도시다. 매년 열심히 키운 포도를 수확하고 이를 축하하며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고 즐기던 풍습이 이어져 오늘날 축제가 되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추석이나 추수감사제 같다.
멜니크는 프라하 중심에서(Ladvi 지하철역) 버스로 40분 정도면 도착한다. 조금만 중심지를 벗어났을 뿐인데, 구름의 모양도 내 키 높이 시선에 닿는 거리도 모두 달라졌다. 버스 정류장에서 1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도착.
상상한 것과 현실이 항상 같다면 삶은 얼마나 무료할까. 고상하고 조용한, 동시에 정겨운 축제 현장을 생각하고 도착한 내 눈앞에 펼쳐진 체코판 월미도. 알록달록한 놀이기구와 아이를 목마 태운 아버지들. 그의 손을 잡은 엄마의 어느 한 때가 따스한 가을 공기 속에서 인화되고 있다. 와인을 마시는 '어른' 뿐 아니라 '가족'을 위한 놀이동산처럼 흥겨운 축제.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 한 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커다란 음악 소리는 심장을 함께 뛰게 한다. 나이를 무릅쓰고 놀이기구를 타볼까 하다가도 이내 혼자임이 뻘쭘하여 포기하고 입장 부스로 쪼르르 이동한다. 입장료는 단돈 120 코루나.(한화 약 7천 원) 입장 팔찌를 차고 뛰어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페트병 와인들.. 참기름을 짜서 유리병에 담아주던 어린 시절 방앗간이 문득 떠올랐다. (가격은 한 통에 6-7천 원 수준)
그래도 와인에 대해서는 꽤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메뉴판에 있는 포도 품종 중 하나도 읽을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가도 세상엔 얼마나 많은 포도가 있는지 새삼 놀란다. 그러다 사랑스러운 핑크 빛깔 와인을 발견했다. 원래 로제 와인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아저씨가 머리에 핏대를 세우며 자랑을 하시기에 한 잔 마셔보았다.
아주 살짝 올라오는 시나몬의 향, 그러면서도 청량하고 가볍다. 날이 더운 여름날 땀을 식히며 한 잔 하면 황홀하겠다. 메인 행사장 뒤편에는 입이 쩍 하고 벌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져 있다. 성벽 아래의 포도나무들과 이름 모를 호수 그리고 서로 다른 녹음. 붉은빛을 띠는 초록, 금색을 띠는 초록, 푸른빛을 띠는 초록이 한데 모여 점묘화처럼 풍경을 꽉 채웠다. 감동을 주는 풍경을 안주 삼아 와인 한 모금. 나의 날이 오늘까지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행복이 가슴에 시리다.
그러다 문득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평소에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곡. 탬버린의 경쾌함과 기타의 전율, 드럼의 무게감이 한 데 어우러져 가을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이럴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는 어린아이 마냥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메인 광장 뒤편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연장에는 꽤 많은 청중이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국가도, 언어도, 피부색도 다 다른데, 가사의 뜻도 모르는데 마음을 관통하는 음악의 힘. 그리고 음표를 손가락으로 튕겨내는 연주자의 힘.
얼굴로 운명을 점친다든가, 인생이 얼굴에 묻어난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날 만난 탬버린 치는 아저씨의 표정은 정말 충실히 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음악이 그를 웃게 했을까, 아니면 그는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일까. '일'을 하면서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이 가능할까. 나도 저런 얼굴, 저런 표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열정과 행복함에 전염된 청중은 하나둘씩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마지막 곡이 끝나갈 때 즈음에는 모두가 일어나 있었다. 아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연인 혹은 혼자라도 상관없었다. 우리에겐 행복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석양이 어깨에 내려앉을 즈음, 놀랍게도 뮤직 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EDM 공연이 펼쳐졌다. 몽환적인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현란한 형용색색 조명, 키 작은 아이를 목마 태운 아버지, 그 옆에서 몸을 흔드는 할머니. EDM은 젊은 이를 위한 장르라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 와인이라는 키워드로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릴 때까지 오래도록 웃고 춤추며 와인을 마셨다.
멜니크 와인 축제가 더 궁금하다면?
http://www.vinobranimelnik.c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