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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Feb 10. 2019

올리브 나무가 반짝이는 곳, 토스카나

토스카나 방앗간의 올리브유, 그리고 거대 스테이크의 행복

구름 하나가 올리브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다. 

창밖으로 세월이 가고 있었다.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을 한참 지켜보다 부엌으로 가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내려 마셨다. 지금은 오후 3시, 여기는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물감처럼 번져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흐가 아를에 머물 적에 단골로 그렸던 소재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말했다.


"사이프러스가 줄곧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어. 지금까지 내가 본 방식으로 그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놀라워. 사이프러스는 그 선이나 비례에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이나 아름다워. 그리고 그 녹색에는 아주 독특한 특질이 있어. 마치 해가 내리쬐는 풍경에 검정을 흘려놓은 것 같은데, 아주 흥미로운 점은 색조라고 할 수 있어. 정확하게 그려내기가 아주 어렵지."

사이프러스 나무와 밀밭 - 빈센트 반 고흐

여행을 떠난지게 제법 되었다.  나는 녹음의 한 복판에 둘러 쌓여 있다. 여기는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역.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생산지 중 하나이다. 여기서 토막 질문. 세계에서 가장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프랑스일까? 아니다. 정답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 매년 이탈리아에서는 약 8억병의 와인이 생산되며, 이는 프랑스의 1.15배 수준이다. 그 중에서도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의 대표 와인 생산지다. 주도인 피렌체로 유명한 곳,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토스카나는 와인 메이커 뿐 아니라, 화가, 도금공, 조각가 같은 장인들의 낙원이다. 


토스카나 와인 지도

몇 달 전, 와인 시음회에서 만난 이탈리아 와인 수입사 대표가 고맙게도 자신의 와이너리에 초대해주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떻게 이어지고 끊어질지 참 모를 일이다. 호스트는 공항까지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몇 개월 간의 공백을 메우는 가벼운 안부를 나누고, 그는 토스카나 와인에 대해 참 재밌고도 자세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차창 유리 밖으로 펼쳐진 압도적인 풍경에 귀가 멀어버린 것일까. 포도밭보다 조금 더 높은 고도에 차도가 있어 광활한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도, 수평선을 분절하는 산도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 그림 한 장. 


토스카나의 풍경, 사진기가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꿈같은 순간에 허우적대던 나를 그가 처음 데리고 간 곳은 올리브 기름을 직접 만드는, 한국으로 치면 방앗간 같은 공간이었다. 갓 수확한 올리브 나무 가지를 기계에 넣으면 저절로 올리브가 분리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소 복잡한 공정 끝에 올리브 기름이 만들어진다. 기계의 끝, 수도꼭지 비슷한 것에서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나의 호스트가 그곳에 바로 손가락을 갖다대어 올리브유 몇 방울을 묻히더니 이내 입속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는다. '헛, 저래도 되는 걸까?' 그는 내게도 올리브유를 맛보라고 권했다. 용기를 얻어 이제 막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 그것을 음미한다.


어...? 맵다. 올리브유가 맵다. 색 또한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아는 노란 빛이 아닌 연녹색의 액체. 원래 생산 직후에는 맵고, 색이 녹색인 것이 당연하단다. 시간이 흐르면 천천히 산화가 일어나면서 맛이 부드러워지고 색도 노랗게 변한다고 한다. 갓 짜낸지 3주 정도가 지나면 가장 맛있는 상태가 되고, 수확기에 만든 올리브유를 일년 내내 먹는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김장 문화 같다. 

(좌) 갓 짠 기름 시음  (중) 올리브 열매  (우) 수확된 올리브 나무 가지들


'이 신기한 경험을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선물해야지.' 그렇게 올리브유 몇 병을 집어든다. 컨베이어 벨트로 끊임없이 운반되는 올리브 나무 가지들을 넋놓고 바라보다 우린 저녁을 먹기위해 자리를 옮겼다.


차로 10분 쯤 달렸을까. '이런 곳에 식당이 있어?'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외지고 한적한 도로. 덩그러니 낡은 건물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꽤 오래 되어 보이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햄과 벽면을 가득 채운 와인, 그리고 벽에 붙은 낡은 그림들이 보였다. 테이블과 의자 모양은 모두 달랐는데, 이들이 한데 모여 묘한 통일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식당 주인 남자는 나의 호스트를 보자 두 팔을 벌려, 내가 이탈리아에서 본 것 중 가장 큰 미소로 그를 반겼다. 메뉴판을 읽지 못해 눈에 물음표를 띄운 나를 위해 호스트는 몇 가지 음식을 추천해주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푸아그라 요리와 토스카나 지역의 화이트 와인을 몇 모금 홀짝이는데, 식당 주인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조리 전의 거대한 고기 덩어리를 가져 왔다. 토스카나는 티본 스테이크로도 유명하다. 저 큰 고기를 어떻게 다 먹지 생각하다 옆으로 눈을 돌렸는데, 옆 테이블의 커플이 1인 1고기를 하고 있다. 



깊은 눈과 멋진 회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 눈썹을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능력을 가진 남자. 나는 그가 내놓은 거대한 스테이크를 먹으며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거지?” 하며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입술에 소스를 묻히지 않고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와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쌌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아몬드 향이 나는 것도 같았고 여름의 쌉싸름한 풀 향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와인잔을 달그락거리며 3시간에 걸친 식사를 마치고서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일어날 수 있었다. 


10월 말의 토스카나. 칠흑 같은 밤이었고, 가을 안개와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별사탕의 반짝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일은 호스트가 관리하는 와이너리에 가기로 했다. 충만함 때문인지, 부른 배 때문인지, 들이킨 와인 때문인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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