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후 네 시간 동안 음료를 마시며 일어나 소소한 일들
햇살은 야위었지만 당신 뺨을 비추기엔 모자라지 않아서,
나는 당신 앞으로 커피를 슬며시 밀어놓았던 것인데
-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中
똑똑똑. 여느 때처럼 그는 현관문을 두드린다. 햇살이 아슬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흰색 커튼 너머로 오늘도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호스트가 보인다. 오늘이 이 곳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첫날이든 마지막 날이든 결코 빼먹을 수 없는 한 가지 의식이 있다. 바로 모닝커피, 카푸치노 한잔.
카푸치노는 이탈리아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근사한 방법이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든든하고 깔끔한 한 끼 식사... 라지만 나에겐 간식일 뿐이다. 자꾸만 입술에 우유 거품과 시나몬 파우더가 묻는 것 같아 연신 입술을 닦아낸다. 호스트는 내가 떠나기 전 자신의 친구의 중고 예술품 가게에 들려보자 했다. 언젠가 그곳에서 봤던 파란색 기둥 조형물을 살지 말지 몇 달간 고민 중이란다.
가게에 도착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불도 꺼져 있다. 호스트는 전화를 몇 통 하더니, 조금 기다리면 친구가 문을 열어주러 올 거라 했다. 그를 기다리며 우리는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기러 카페로 왔다. 행운일까? 마침 근처에서 빈티지 자동차 전시회가 한창이다. 멋들어진, 그리고 독특한 곡선을 자랑하는 차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있다.
이 전시회는 특정 기업이 주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동차를 모아 진행되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근사한 차를 오랜 시간 동안 반짝반짝 빛나게 관리한 주인들의 정성과 노력이 존경스럽다. 유려한 곡선과 피처럼 붉은 빨강, 날렵하게 빠진 뒤태. 저 차는 어떤 사람을 태우고 어느 해안가를 달렸을까? 운전자는 무슨 노래를 흥얼거렸을까. 조수석엔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바람을 즐기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갖은 상상을 해본다.
오래지 않아 중고 예술상을 운영하는 친구분이 나타났다. 호스트와 친구는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했고 나는 마치 시장에서 친구를 만난 엄마의 수다가 끝나길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된듯했다. 그들은 한 잔의 커피를 더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를 배려해서인지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마구 섞여 공기 중에 떠돌았다.
한 시간쯤 대화가 이어졌을까. 그제야 우리는 자리를 옮겨 중고 예술품 가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정말이지 '온갖 것들'이 있었다. 등장인물이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동양화, 어떻게 앉는지 질문해봐야 할 듯한 변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카누 등. 통일감 없는 소품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나는 탐험가처럼 매장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 와중에도 호스트와 친구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말이 많다.) 결국 그날도 호스트는 파란색 기둥을 살지 결정하지 못했다.
약간 지친 우리는 시내로 점심을 먹으러 왔다.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특이한 푸아그라 요리를 시작으로 우리는 쉬지 않고 먹고 마셨다. 점심 저녁 구분 없이 항상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 이들 문화가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물론 당연시 여겨지는 음주운전은 제외다.
우린 피렌체의 오래된 성당 지붕이 내려앉았다든가 토스카나의 나무들이 어떻다든가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식사가 끝난 후엔 후식으로 언제나처럼 그라파를 마셨다. 그라파는 이탈리아 증류주 브랜디의 일종으로, 포도 찌꺼기를 발효시킨 알콜을 증류해서 만든다. 배도 채웠겠다. 이제, 짐을 싸고 다음 도시 시에나로 가야 한다. 슬슬 여행의 끝이 보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