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와인을 보유한 소믈리에의 메카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 파울로 코엘료
'살면서 꼭 한번 가보고픈 장소가 있나요?' 쏟아질듯한 별에 눈이 부신 몽골의 초원, 밤에도 빛나는 에베레스트 산 봉우리, 거울처럼 비치는 유우니 사막, 그리스인 조르바로 더 유명한 크로아티아.
인생은 유한하고 세상은 넓고, 욕심은 많아 가고 싶은 곳은 열 손가락을 다 꼽아도 부족하다. 하지만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와인 애호가들에게 추천한다. 소믈리에들이 평생 한 번은 방문하길 희망하는 메카와 같은 레스토랑, La Tour d'Argent(뚜르 다르장 이라 읽는다).
파리엔 특이한 레스토랑이 있다. 특이하다기보단 특별한, 뚜르 다르장. '은색 성(Silver Tower)'이라는 뜻이다. 레스토랑 로고의 오픈 연도 ‘1582’가 말해주듯 역사와 사연이 풍부한 유서 깊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중 하나다. (무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며 케네디, 레이건 대통령, 그레이스 켈리 등 어마어마한 연사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뚜르 다르장은 센 강과 노트르담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파리의 낭만을 음식과 함께 흡수할 수 있다. (창가에 앉으려면 최소 2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하지만 뷰가 아름답고 음식이 맛있을 뿐 아니라 이 곳의 특별한 점은 따로 있다.
와인 리스트를 요청하면 약 만 오천 종류의 와인이 등록된 400쪽 분량의 ‘요약본’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요약본이며, 실제 와인 보유량은 50만 병, 500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파리 침공 후 뚜르 다르장의 셀러를 약탈하려고 했다. 입구를 콘크리트로 봉쇄하고 인위적으로 거미줄을 쳐 끝내 셀러를 지켜냈다는 일화도 있다.
비잔틴 제국에서 고안된 것으로 알려진 '포크'는 식기 중 그 역사가 가장 짧은데, 이탈리아에서는 10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널리 확산되지 못하다가 15세기에 이르러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때도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남성답지 못한 여성적 행동이라는 인식 때문에 냉소의 대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까지 포크 같은 도구 없이 손과 나이프로 음식을 먹었다. (이 세련된 사람들이..) 그러다 보니 음식이 옷에 묻기 십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앙리 3세는 이탈리아에서 뚜르 다르장으로 포크를 가져와 '프랑스 사람들도 교양 있게 포크를 쓰자'라고 선언했다. 18세기 프랑스혁명 이후 포크가 급속도로 재인식되었고, 특히 지위를 박탈당한 귀족이 평민과 차별화를 도모하기 위해 식사 예절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당시 포크는 신분이 높은 자들이 사용하는 도구의 상징이었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위가 천하게 여겨졌다.
앙리 3세는 특히 이 곳의 시그니처 오리 요리를 정말 좋아했다. 고기를 압착하는 방식의 특이한 레시피로 육질의 부드러움을 극대화했단다. 식사를 마치면 숫자가 적힌 엽서 같은 카드를 주는데, 이는 1890년 이후부터 뚜르 다르장이 요리한 오리의 수이다. 이곳을 방문했던 2017년 10월 당시엔 1,159,098번째 오리가 나의 뱃속에서 소화되었다. 시그니처 메뉴인 오리고기를 상징하는 유리공예 작품들이 테이블마다 올려져 있어 앙증맞으면서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연출한다.
백수 여행객이 이런 호사스러움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 커다란 백팩에 와인 두어 병을 쑤셔 넣고 기차 안에서 병째 마시며 샌드위치를 먹어도 행복하다고 느낀 나였다. 이번에는 정말 감사한 은인 덕에 와인의 성지 뚜르 다르장에 빼꼼 기웃해볼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도 바로 식사 테이블로 가지 못한다. 1층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와 함께 웰컴 스파클링 와인이 서빙된다. 중세풍의 가구와 엄숙한 조명이 자아내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버버하고 있다 보면 서버분이 메인 라운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안내해준다.
높은 층고와 시원하게 파리 전경이 내다보이는 통유리, 천장의 벽화까지 압도감은 계속된다. 여유 있게 식사하는 사람들과, 더 여유로운 표정의 웨이터들이 식당을 메우고 있다. 특이하게 메뉴판은 두 종류가 있고 성별에 따라 구성이 미세하게 다르다. ‘레이디’의 메뉴판에는 가격이 적혀 있지 않은 점. 양성평등을 외치는 현 트렌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어쨌든 흥미롭다.
기본에 충실한 식전 빵과, 뚜르 다르장의 성 모양 로고가 새겨진 버터를 음미하다 보면 먹기조차 아까운 앙증맞은 애피타이저가 서빙된다. 웨이터님께서 열심히 설명해주셨지만, 지금은 어떤 요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와, 정말 예뻐서 어떻게 먹지.'라고 잠시 고민하다 한 입 베어 물고 감탄했을 뿐.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와인. 보통은 수출 과정에서 진동이나 온도 변화에 와인이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뚜르 다르장은 현지에서 와인을 공수해 셀러에 보관하기 때문에 와인 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코르크 마개를 오픈한 소믈리에는 전통방식대로 촛불을 비춰보며 디켄딩을 했다. 혹시라도 와인에 결함이 발생했을까 봐 확인하기 위해 먼저 와인을 먼저 한 모금 맛본다.
와인의 색은 미묘해. 자연에서는 보기 힘든 보랏빛이지. 그저 와인색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적절한 단어가 없어. 다양한 색조의 붉은빛이 깔리기 때문이지. 갈색을 띤 붉은빛, 오렌지 마멀레이드 같은 붉은빛, 그리고 핏빛을 띤 붉은빛.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 특별한 순간, 그리고 특별한 와인. 내가 태어난 년도인 1990년 빈티지의 리쉬부르(Richebourg)다. 나와 연배가 같으니 마실 당시에 28살인 아이였다. 황홀한 장미향, 바이올렛 향이 폭발한다. 신의 물방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백 가지 꽃향기가 난다는 와인이다. 30년 가까이 보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과일과 꽃 향기, 부케가 복합적으로 입 안을 감싼다. 한참을 지나도 가시지 않는 여운을 형용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함이 아쉽다. 디켄딩 후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잠들어 있던 향이 깨어나며 코 끝을 간지럽힌다.
유달리 날이 맑았던 10월의 토요일 오후는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고, 오직 그것만은 진실이니까. 아름다움을 만나면 이를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이 순간을 조금 더 오래 소유하려고 평소보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였다.
여행하는 동안 당신은,
당신과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겁니다.
물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테고요.
-웹사이트 : https://tourdargent.com/
-주소 : 17 Quai de la Tournelle, 75005 Paris
-영업시간 : 화요일~토요일 오후 12:00~2:00, 오후 7:00~9:00 (일, 월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