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샤블리에서 찾은 샤블리 와인
어떤 곳에 대한 기억과, 그곳에 대한 기대에는 모두 순수함이 있다.
샤블리는 순수함으로 기억된다. 처음 와인에 매료된 것도 샤블리 덕이다. 몇 해 전 지금보다 마음이 한 뼘 작았을 때, 함께 무수히도 많은 술잔을 기울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샤블리였다. 그가 샤블리에 있다는 일곱 개의 특별한 밭과, 그곳의 바람과 햇살을 이야기하면 나는 여행을 떠난 듯 황홀했었다. 와인을 마시며 와인 이야기를 하면 세네 시간은 그냥 지나갔고, 그와 더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고 싶어 와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번역한 와인 단어도 샤블리였다.
10월의 어느 날. 지금은 오후 세시. 나는 샤블리에 와 있다. 내 기억 속 순수한 도시. 뼛속까지 시렸던 스위스와 비교하면 오히려 이 곳엔 봄이 온 듯했다.
인구가 2천 명이 채 되지 못하는 샤블리 마을. 스랭 강이 흐르고, 마을 한쪽의 언덕배기에는 유명한 포도밭이 자리 잡고 있다. 위치는 프랑스의 북동쪽, 부르고뉴 지방의 최북단이다.
하지만 이곳은 부르고뉴의 주요 와인 생산지인 본에서 꽤 거리가 있고, 산맥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그 만의 특이한 와인이 만들어진다. 대륙성 기후 탓에, 여름에 꽤 덥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워서 산미 높은 와인이 생산된다. 샤블리의 토양은 굴 껍데기와 같은 석회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와인에 독특한 미네랄 뉘앙스를 부여한다. 석회석으로 지어진 탓에 마을의 건물도 온통 회색이다.
시내엔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충분할 만큼 몇 안 되는 레스토랑이 있었고, 와인샵은 그보다 두 배쯤 많았다. 한국에서 수도 없이 마셨던 와인 생산자의 이름을 내건 가게들을 구경하며 휘청휘청 시내를 돌아다니다 낡은 성당을 발견했다.
종교는 없지만, 육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어둠 속에 초 몇 개가 빛나고 성당 가운데 예수상이 근엄하게 우릴 내려다본다. 세 번째 의자에 앉아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신, 당신이 어떤 형태이든 누구든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몇 가지 소원을 중얼거렸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덧 하늘 한 켠이 불을 놓은 듯 붉어지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도 노을이 내려앉았다.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줄어든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다소 특이한 식당을 방문했다. 라로쉬라는 와인 메이커와 연계되어 있고, 셰프 전원이 일본인이다. 라로쉬라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위상도 높은데, 프랑스인이 아닌 일본인 셰프를 내세운 점이 독특하다. 음식 하면 자부심이 엄청난 프랑스 아닌가... 여기서 일하고 있는 셰프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여러 경험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게는 좁고 테이블도 몇 개 없었지만 깔끔하고 단정했다. 서버는 일본 특유의 발음이 묻어나는 영어로 주문을 받았고, 그 예의바름과 다소곳함에 나도 접시에 얼굴을 박을 정도로 인사했다.
잠시 후 올리브 오일이 듬뿍 뿌려진 선어회와 빨갛고 노란 토마토, 그리고 바질 잎이 마치 그림처럼 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선어회와 토마토, 그리고 올리브 오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침샘을 자극한다. 그다음으로 준비된 대구 요리도 엄청났다. '어떻게 이런 맛을 낼 수 있지?'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과연 와인이다. 샤블리에서 마시는 샤블리 와인. 샤블리 와인은 어릴 땐 아주 옅은 노랑에서 볏짚 색, 절정기에 이르면 황금색으로 변한다. 그날 마신 와인은 2012년 산, 몽드미유라는 꽤 훌륭한 밭에서 재배된 포도로 양조되었는데, 기분 좋은 명랑한 노란빛을 띠고 있다. 몽드미유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몽글몽글 굴러다닌다. 꽤나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기분 좋은 과실 향, 동시에 튼실한 바디감과 끚맺음이 이어진다. 옆 테이블엔 와인을 시음하러 온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어넘기고 있다. 저마다 한 손에는 굴, 다른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나도 그들과 같은 얼굴일까.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향한다. 칠흑 같은 밤이었고, 하늘에는 별이 모래처럼 흩뿌려져 있고, 가을 안개와 스산한 밤공기가 스친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