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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Dec 16. 2018

별이 돋아나는 물의 도시, 보르도

퇴사생의 뚜벅뚜벅 와인 여행

모든 것에는 깨진 틈이 있어.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오지.  - 레너드 코헨 


가을이 무르익었고, 나의 여행도 절반쯤 왔을까. 오랜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살면서 필요한 어지간한 물건들은 26인치 캐리어에 다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머리 마는 기계도) 물론 캐리어를 들고 쉬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보르도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에 적합한 도시는 아니다. 도로엔 온통 굵직굵직한 돌멩이들이 박혀 있고 건물엔 엘리베이터의 흔적 조차 찾아볼 수 없다. 연약한 캐리어의 바퀴는 돌멩이 틈 사이에서 엇나가기 십상이며, 계단으로 캐리어를 끌어 올리려면 헬스장에서 역기를 들 때 보다 두세배의 힘을 써야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도시를 이루고 있는 르네상스 풍의 화려한 건물들을 아로새길 여유를 잃기도 한다.  

요리조리 지도를 돌려보며 힘겹게 도착한 에어비앤비 숙소, 초인종 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휴대폰 너머로는 정없는 기계음 소리만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휴, 어떻게 해야 할까. 

  

야속하게도, 와인 빛으로 물든 노을이 지나간 자리엔 밤 하늘 가득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한숨을 짧게 쉬다가도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오도카니 놓인 캐리어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다가, 여전히 대답 없는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번호를 눌러보길 몇 차례. 결국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와인을 공부하려고 보르도로 건너와 아르바이트 하는 한국 처자다. 

그녀는 일단 내 덩치만한 캐리어를 자기 집에 갖다두고 저녁을 먹자고 했다. 일단 속이 든든해야 머리도 돌아간다며 그가 이끈 곳은 쌀국수 가게다. 보르도에서 쌀국수라니 뭔가 우습기도, 정감가기도 하다. 그 따수운 국물이 손가락 끝까지 퍼져 야위었던 마음을 안아주었다. 마지막 한 방울도 남김없이 국수를 다 먹을 때 까지도 숙소 주인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지인이 보르도 가이드를 자처해주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부르스 광장 (출처 : HMG Journal)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작하는 보르도의 미묘한 아름다움. ‘Bord de l’Eau’, 물가라는 어원을 가진 도시다. 시내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가론강에 닿는다. 아직 가을 밤 바람이 조금 서늘한 10월의 수요일 저녁. 강가를 걷다가 마치 하늘과 대지를 뒤집어 놓은 듯한 넓은 광장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평면 분수가 있는 부르스 광장, 이 광장의 다른 이름은 '물의 거울'이다. 

복숭아 뼈에 닿을까 말까 찰랑찰랑한 물에 보르도의 불빛과 하늘, 그리고 공기가 눈부시게 반사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연인들은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고, 아이들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 사이를 뛰어다닌다. 


물에 비쳐 반짝이는 부르스 궁전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넋을 잃어 본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멍하니 서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아직 에어비앤비 호스트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런 곳이라면 하늘을 이불 삼아서 하루쯤 노숙이라는 경험을 해봐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보르도의 야경은 눈 부시고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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