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새로운 곳을 여행할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런던 자체에도 볼거리와 할 일이 많았기에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시내 곳곳을 탐방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었다. 다른 지역을 여행할 생각을 딱히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 친구들이 주말에 브라이튼으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며 동행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다. 브라이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새로운 지역을 여행할 기회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함께 가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런던을 떠나는 첫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주가 지나고 약속했던 주말이 다가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여행 준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내심 기대감은 커져갔다. 당일 아침, 설레는 마음을 안고 빅토리아 역으로 향했다. 브라이튼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는데, 빅토리아 역으로 가는 동안에도 런던 특유의 우중충한 날씨가 나를 맞이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날씨가 여행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를 바랐지만, 영국에 온 이후 웬만한 비는 이제 익숙해진 터라 그다지 개의치 않으려 했다.
역에 도착하니 브라이튼으로 함께 갈 여행 멤버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 6명, 중국인 3명, 태국인 2명이 이번 여행의 일행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기차에 오르기 전 간단히 먹을 간식과 음료를 샀다. 기차에 올라타고 자리를 잡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이튼으로 향하는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런던 시내에서 주로 타고 다녔던 지하철과 달리 기차 창 밖으로는 또 다른 런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도시를 벗어나면서 점점 펼쳐지는 영국의 자연 풍경은 나에게 낯설면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창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 오래된 농가들, 그리고 푸른 언덕을 스치는 모습은 그동안 런던에서만 보던 바쁘고 복잡한 도시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기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목적지인 브라이튼에 도착했다. 우리는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고, 그때 비로소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침에 출발할 때부터 우중충했던 런던의 날씨는 브라이튼에 도착해서도 변함없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땅은 비에 젖어 있었지만, 지금 당장 비가 오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무렵엔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겼지만, 런던에서 생활하다 보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는 우산 없이 다니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그래도 해변에 왔으니 바다를 봐야 하지 않겠냐"라고 제안해, 우리는 바닷가로 향했다. 영국의 해변에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런 날씨가 흐려 바다의 푸른빛은 제대로 느낄 수 없었고, 생각보다 감동은 덜했다. 날씨만 좋았다면 시원한 파란 바다와 맑은 하늘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아니었다. 해변에서의 짧은 산책을 뒤로하고, 우리는 세븐시스터즈 절벽을 보러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세븐 시스터즈는 가기 전까지는 그저 절벽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사실 그곳은 수백만 년의 세월이 빚어낸 자연의 걸작이었다. 절벽들은 백악질로 이루어져 있고, 해변을 따라 새하얗게 늘어 건 모습이 유명한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날씨는 계속 변덕을 부렸다.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고, 가끔씩 햇살이 얼굴을 비출 때면 살짝이나마 기대감이 다시 올라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세븐 시스터즈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도착했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강한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절벽으로 올라가는 산책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을 드넓은 초원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풀을 뜯는 소떼를 보았다. 영국의 소는 한국에서 보던 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그 소들을 보며, 영국에서 동물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지내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그 소들을 바라보며 웃음이 나왔다. 초원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세븐 시스터즈 절벽 중 하나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하얀 절벽이 파란 마다와 맞닿아 있는 모습은 그동안 본 적 없던 장관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두고 싶어,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사진으로 그 광경을 온전히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그저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만이 그 순간의 감동을 제대로 간직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절벽 위에서 사진을 찍고 풍경을 감상한 후, 갑자기 한국인 동생과 함께 하얀 돌멩이들을 모아 땅에 'KOREA'라는 글자를 적었다. 이국 땅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새기고 나리, 가슴 깊은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꿇어올랐다. 우리는 그 글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마치 그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은 점점 더 세차게 불었다. 우리는 곧 날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 근처의 작은 식당이 눈에 띄었다. 그 식당은 마치 영국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카메라를 들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착한 버스를 타고 다시 브라이튼 역으로 향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본 풍경은 마치 황금빛으로 물든 그림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 마지막까지 셔터를 눌렀다. 그날의 여행은 비록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거셌지만,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런던 밖 영국을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들,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영원히 내 마음에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