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경험하는 신세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영국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점차 익숙해져 갔다.
홈스테이 하우스와 학원을 오가며 당시 살던 동네(Catford)는 매일 오가며 보던 풍경들이다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선 나라, 낯선 환경에 던져진 기분에서 뭔가 심적으로 편안함을 느껴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활하던 주변 환경에 익숙해질 무렵, 이제 런던 시내로 활동 반경을 점차 넓혀가기로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역사와 관련된 것들에 많은 흥미를 가졌었다. 단순히 몇 년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있기 이전에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이 살아왔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남긴 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의 숨겨진 비밀 같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노라면 언제나 나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래서 일정이 빡빡하지 않다면 여행을 가면 그 지역에 큰 박물관이 있다면 방문해서 둘러보곤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에 유명한 유적지는 당연히 방문한다. 물론 사진을 찍는 것보다 유적지 설명을 읽어보고 설명되어 있는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며 둘러보는 것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영국, 특히 런던은 나에게 한편으로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수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대영박물관, 수많은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내셔널갤러리, 그리고 모든 지역에 걸쳐 전해져 오는 수많은 유적지와 역사적인 장소들...
사람마다 어느 지역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연 풍광이 아름다워서, 또 다른 누군가는 쇼핑이나 현대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이 좋아서...
내 경우에는 자연 풍광도 좋고 쇼핑도 좋지만, 가장 우선해서 보는 것은 얼마나 역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역인지, 내가 가서 그것들을 보고 느껴볼 수 있는가였다.
가장 먼저 방문했던 곳은 접근성이 가장 용이했던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였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나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도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것은, 나름 시내라고 내가 생각하는 범주의 지역에 도착할 무렵이면 지나는 거점(?)이 방송에서 나오는데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엘리펀트 앤 캐슬(Elephant and Castle). 이름이 하도 특이해서 대체 왜 코끼리와 성이라는 지역명이지 해서 당시 찾아봤던 바로는 해당 지역에 18세기부터 존재한 런던에서 가장 유명했던 오래된 여관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었다. 또 다른 설은 해당 이름이 스페인어로 '라 인판타 데 카스릴라'(La Infanta de Castilla)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이는 '카스티야의 공주'라는 뜻으로 헨리 8세와 결혼했던 스페인 공주 캐서린의 별칭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었다.
무엇이 진실이든 그 지역의 특이한 이름은 뇌리에 깊게 남았고, 덕분에 버스에서 졸다가도 정류장 이름이 들려오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트라팔가 스퀘어(Trafalgar Square)에 도착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버스가 템즈강을 지나 옆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리고 빅벤이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타워를 지나, 영화 러브액츄얼리에 나오는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가를 지나 북쪽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스퀘어에 도착하곤 했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 트라팔가 스퀘어와 내셔널갤러리의 상징과도 같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 뻗은 넬슨 동상과 동상 뒤편으로 좌우에 자리한 커다란 분수 두 개가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한다.
처음 도착해서 그 광경을 봤을 때, 그 장소에 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걸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에 전율을 느꼈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던 날이었기에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찌를 듯이 세워진 넬슨 동상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영국의 위용을 지금도 뽐내고 있는 듯 보였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은 저마다 동상 밑에 조각된 네 마리의 사자 밑에서 어떻게든 넬슨 동상과 같이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두 개의 커다란 분수 앞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도 동참하여 열심히 사진을 찍어 기록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참 사진을 찍고 나서 이제 내셔널 갤러리에 입장하기 위해 육중한 입구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앞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사람들이 아무도 매표소에서 표를 사지 않고 막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나는 글로벌 매너 시민이기에 황급히 그냥 들어가던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부리나케 매표소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글리 코리안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매표소가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 둘러봤지만 보이질 않았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손쉽게 검색해서 알 수 있었지만, 내가 공부하며 있던 2010년은 아직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보니 그 누구도 표를 내고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간혹 몇몇 사람들이 입구에 비치된 어떤 통에 무언가를 넣고 들어갔고, 가서 보니 돈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아.. 표를 사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들어가는 건가? 얼마 내야 되는 거지?' 생각하며 통을 자세히 보니 이렇게 쓰여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Donation'
그렇다. 기부하려면 기부하고 들어가고 아니면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무료로 관람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나로서는 정말 커다란 문화 충격이었다. 다양한 유명 작가의 세계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을 수많은 전 세계 관광객들이 오가는 곳임에도 무료 관람이라니...
우여곡절 끝에 입장한 미술관 내부는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그 당시 미술관을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미술관이든 박물관은 너무 시끄럽게 이야기하거나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인 양, 마치 다들 잘 아는 사람처럼 보고 고개만 끄덕이는 그런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곳 내셔널 갤러리는 내가 알던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미술 작품을 보면서 같이 온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림을 보면서 본인이 가져온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지고 따라 그려보는 학생들, 그리고 유치원에서 견학 나온 어린아이들에게 작품을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그곳에는 있었다.
딱딱하고 격식을 갖춰야 올 수 있는 곳이 아닌 우리 삶의 한 부분처럼 누구나 언제든 찾아와 명작이라는 그림들을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 특히 어린아이들도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이러한 것들을 보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환경..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영국이라는 나라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현실과 다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바는 그러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정말 수없이 많은 그림들을 보면서 이게 누구 작품인지 설명을 읽어보면서 그림을 바라봤었고, 이건 내가 아는 작가의 작품, 아닌 작품 정도로만 구분을 했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방문하다 보니 나름 그림을 보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었다. 누구의 작품인지보다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오늘 이 그림이 마음에 들어왔다 싶을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점묘화는 점묘화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유화나 수채화 역시 그 그림마다 색감과 질감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고, 방문할 때마다 바라보던 그림이 있는데 한 가지는 작가와 제목은 잘 모르지만 한 장소의 풍경을 새벽, 아침, 낮, 밤의 풍경으로 4장의 캔버스에 그린 그림과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그림은 뭔가 정적이면서도 그 시간이 변화함에 따른 풍경의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림이라 좋아했었고, 고흐의 해바라기는 내가 고흐의 그림을 실물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그림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런던에서 사는 동안 최대한 자주 와서 눈에 많이 담아두고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실제로도 내셔널 갤러리에 방문하면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꼭 보고 가는 작품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적응하며, 다양한 역사적 유물과 예술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나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역사와 예술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