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상에서 만난 인연이었기에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너무도 소중한 인연이 되었던 친구들.
어찌 보면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도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친구들을 어학원에서 만났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들이 가장 많은 추억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특별한 친구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인연을 이어오는 친구들 중 대다수가 어학원에서 처음 수업했던 클래스의 친구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각자 처음 낯선 환경에서 첫 수업을 받으면서 만난 같은 처지의 청춘들이었기에 공감대 형성이 쉬웠고 더 빠르게 가까워졌던 것 같다.
어학원에서의 첫 클래스에는 이후 어느 클래스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함께 했다.
남미 국가의 친구들(브라질, 에콰도르, 콜럼비아 등), 유럽권역 친 구들(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벨라루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권역 친구들(한국, 일본, 중국, 태국 등), 터키 친구들 등 전 세계 대다수 인종들이 모여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은 인연들 가운데 너무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시에는 서로 철없는 학생 시절이라 지금 그들이 보내는 시간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자면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는 친구들이 있다.
멕시코와 태국이라는 각자의 나라에서 정계에 입문한 Erick과 Enji.(에릭과 엔지라 하겠다.)
엔지는 태국에서 공부하러 왔던 당시로는 10대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어학원에서 항상 모두가 친구지만 동생뻘이었기에 다들 친구보다는 동생처럼 챙김을 받는 그런 친구였다. 태국 이름이 있지만 발음하기 어렵다며 엔지라고 불러 달라고 해 친구들은 지금도 그녀를 엔지라고 부르고 있다.(물론 태국 친구들끼리는 실제 이름을 부르겠지만...) 당시에는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한국에 귀국하고 정신없이 취업 준비와 취업 후 사회생활에 찌들어가던 어느 날, 그 친구의 Facebook에서 태국어로 쓰여있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선거유세하는 장면과 같은 모습의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아버지가 태국에서 정계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자연스레 그 친구도 아버지 뒤를 이어 출마했었던 것이다. 지금은 당당하게 당선되어 다양한 국정 업무를 수행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 한편으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엔지는 그래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 이미지였던 터라,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면 에릭은 정말 깜짝 놀랐다.
영국에서 언제나 펍에서 맥주만 퍼마시고 반쯤 취한 모습으로 수업에 들어오던 그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가 멕시코에서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방송에서 토론을 하고,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하며 정치를 하고 있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어학연수 이후 귀국해서 본인 나름의 꿈과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여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대단한 일이지만 그의 놈팡이 같은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지냈던 친구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이 둘은 정말 천지가 개벽할 만큼 영국에서 같이 생활하던 시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삶을 산다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지금의 나와 같이 직장을 다니며 가정을 꾸리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친구들 가운데서 신기하게 너무도 친해져 지금도 다른 친구들 보다도 끈끈한 관계인 소위 말하는 베프. 아니 그보다 서로 Bro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한 친구.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인 에콰도르에서 왔던 나의 Bro. Juan Carlos.(후안 카를로스.. 후안이라고 하겠다.)
그와의 첫 만남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과 같이 어학원 클래스에서 만났고 당시에는 서로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상태였기에 수업시간에 띄엄띄엄 인사하고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처음에는 생김새도 다르고 문화도 전혀 달랐던 그 친구보다 비슷한 문화권이었던 중국과 일본 친구들이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졌고 실제로도 그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러다 서로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처음보다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서 좀 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교류하면서 그 친구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친구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주말에 뭐 할 거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된 적이 있었다. 대부분 친구들은 런던 시내에 나가서 쇼핑을 한다거나 밤에 클럽에 가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나는 그 주 주말에 런던을 벗어나 다른 지역인 케임브리지에 놀러 가려는 계획을 세우던 차였기에 케임브리지에 놀러 갈 계획이라고 이야기하자 후안이 눈을 번뜩이며 본인도 같이 가도 되겠느냐고 이야기를 꺼냈다.
뭐 같이 못 갈 이유가 없었으니 당연히 같이 여행 가는 것으로 갑작스레 여행 계획이 잡히게 되었다.
마음 한편에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 친구와 여행을 해야 한다니 하는 걱정이 있기는 했지만,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데 다른 국적의 친구와 같이 여행을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이 더 컸던 것 같다.
주말이 되었고, 후안과 나는 King's Cross Station(킹스 크로스역)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만났다. 기차 안에서 먹을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고 기차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서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어를 사용하며 수다를 떨며 케임브리지로 여행을 떠났다. 도착한 곳은 도시 전체가 대학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기에 충분했다. 거리에 즐비한 오래된 건물들을 지나 석재로 지어진 학교 건물들은 그 웅장함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학교 곳곳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서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곳곳을 둘러보았다. 신기하게도 말이 잘 통하지도 않고 생활양식도 다른 나라의 사람이었지만 불편함이나 답답한 것 없이 오히려 말이 잘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되는 것들이 있었고 의외로 여행 스타일이 잘 맞았다. 그래서 그 이후 그 친구와 여행을 가기도 하고, 또 다른 남미권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는 등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었다. 덕분인지 지금도 연락하는 많은 친구들 중 남미 친구들이 가장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케임브리지에서(2010)
그리고...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과 가장 친한 친구 이외로 지금도 인상 깊은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료헤이.
당연히 이 친구도 첫 수업 같은 반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였고, 클래스에서 당시 가장 영어 소통이 힘들었던 친구였다. 다른 친구들은 그래도 띄엄띄엄 말을 하고 서로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이 친구는 정말 발음도 일본인 특유의 영어발음인 데다 리스닝과 스피킹 모두 많이 부족했던 터라 같은 국적인 일본인들을 제외하고는 의사소통이 많이 힘든 수준이었다. 다른 일본 친구들이 중간에서 전달해 주며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처음에는 그 친구도 나름 많이 힘들었을 터였다.
그 친구에게는 당시 다른 친구들과는 많이 다른 점이 하나가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지금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바로는 60대 후반의 나이를 가진 특별한 친구였다.
우리나라에서라면 20대 젊은이들과 60대의 어르신이 친구가 되는 일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물론 일본 친구들은 당연히 본인 나라의 어르신이었기에 친구라는 느낌보다는 어르신을 챙겨드린다는 느낌이 많았지만...) 그와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었고 심지어 문화권마저도 다른 나라.(어른들도 이름으로 막 부르는 우리나라 관점에서는 예의 없어 보이는??)였기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서양 국가라 하더라도 존칭이 존재할 테고 어르신들을 막 친구처럼 대하지는 않겠지마는 당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이들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지 알았겠는가. 그저 모두 Friend였다. 그러다 보니 나이란 벽 없이 사람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오롯이 편견 없이 그 사람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료헤이 아저씨는 은퇴하신 후 아내분과 생활하시다가 문득 더 나이 들기 전에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와 자녀들에게 꼭 영국에서 영어를 공부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가족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왔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름이 돋았고 그가 너무도 멋져 보였다.
내가 당시에만 하더라도 주변에서 보던 60대 후반의 어르신들은 본인들은 이미 늙었다. 새로운 것은 도전하기에 늦었다. 등의 이야기와 행동을 보이며 젊은이들에게 세상이란 무대를 내어주고 뒤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시는 모습으로 느껴졌는데 료헤이 아저씨는 60년 이상 살아온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고 그는 여느 20대 젊은이와 똑같았기에 나와 다른 친구들은 그래서 그를 조금은 특별하지만 그냥 우리의 친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료헤이 아저씨는 영국에 계시는 동안 친구들이 하는 모든 활동에 빠지지 않고 함께 했었다.
런던 시내 구경을 할 때도,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갈 때도, 심지어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는 유명 펍이나 핫플레이스를 갈 때도 그는 함께였고 우리와 같이 즐겼다.
그럴 때 항상 그가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봐. 친구들. 인생에 늦은 건 없는 것 같아. 포기하지 말고 뭐든 도전해. 인생은 아름다워.
그는 본인의 스케줄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활발하게 SNS를 통해 나를 포함한 세계 각지의 젊은 친구들과 언제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살아가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가 전해오는 소식에서 그는 일본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당시 나와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철없는 20대였던 그 시절 나 역시 지금까지도 료헤이 아저씨가 이야기해 주었던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인생의 모토처럼 삼아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또한 그가 나이라는 벽을 두지 않고 자식뻘인 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귀국한 이후로는 그 누구에게도 '몇 살이세요?'라거나 '몇 년생이세요?'라는 질문은 일절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참 많은 것을 일깨워 준 료헤이 아저씨가 얼마 전부터 SNS 활동이 없어 친구들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다.
하지만 연락할 방법이 SNS밖에 없던 탓에 기다렸지만 그의 소식은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너무 궁금했던 나는 근처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 친구에게 그의 소식을 한번 알아봐 줄 수 있는지 물었고 흔쾌히 알아봐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렸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확인을 해달라 부탁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들려준 소식은.. 료헤이 아저씨가 돌아오실 수 없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셨다는 이야기였고, 가족들이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는 말과 함께 아저씨께서 그 여행을 떠나시기 전까지도 영국에서 생활했을 때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들 이야기하시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던 나의 아저씨 친구 료헤이..
그는 세상을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살아왔던 것처럼 새로운 여행지도 친구들보다 먼저 출발해서 떠났다.
짧은 기간 만났던 인연이었고, 그저 흘려보낼 수도 있는 인연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나의 친한 친구들이며 지금도 서로 각자의 나라를 방문하게 될 때면 연락하고 시간이 될 때면 잠시라도 만나 밝게 웃는 사이.
그들과 내가 서로에게 남긴 색과 향기는 지금도 서로에게 남았듯 앞으로도 지속되길 소망해 본다.
그리고 먼저 멀리 여행을 떠난 료헤이 아저씨 이렇게 여행을 가실 줄은 몰라 이곳에 아저씨께 짧은 인사 남깁니다.
해맑게 웃던 당신의 모습과 이야기를 이제는 볼 수는 없지만 2010년 영국에서 함께 했던 추억 속의 료헤이 당신이 보여준 멋진 모습과 생각들. 나의 가슴속에 언제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