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불이 나뜨아... 불이야!!!”
“불이야!!”
백할머니의 갈갈하고도 작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창가에서 집안으로 불씨를 넣으려던 누군가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1층 입구에 쌓아둔 폐지에는 이미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범인은 오토바이를 타고 줄행랑을 쳤다.
까만 헬멧에 까만 오토바이가 단서가 될 수는 없었다.
혜정이 불길을 보고 현관앞에 쌓인 콜라를 흔들었다.
콜라의 강력한 탄산으로 불씨를 순식간에 꺼뜨렸다.
연기가 위로 차올랐지만 다행히 큰불이 아니었기에 이내 사그라들었다.
유튜브에서 본 내용이 이렇게 혜정의 목숨을 구해줄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알고리즘이 예언까지 해주는 건 아니겠지만 신통했다.
소방차와 구급차가 출동했다.
소방관들이 혹시 모를 잔불을 정리하고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했다.
경찰은 방화용의자의 CCTV를 주변에서 확보하고 탐문 중이었다.
연기를 살짝 마신 백할머니를 모시고 구급차는 떠낫다.
지나가는 이가 슬쩍 말을 흘린다.
“저 빌라 아주 흉물스러워..”
“그러게 저긴 매일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어..”
“이번에는 불이 났대.”
동네에서 유일하게 홍할머니만 빌라를 팔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유없는 악담을 퍼부었다.
주변이 다 아파트로 둘러 쌓여 빌라와 함께 무너져 죽을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지독한 알박기라고 욕을 했다.
돈에 미친 늙은이라고 욕했다.
추진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할머니를 찾아왔지만 할머니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
언제인가부터 빌라에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화재도 그런 맥락에서는 의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건설사에서도 처음에는 좋은 조건을 내걸며 회유를 해보려했다.
끝까지 홍할머니가 고집을 부리자 건설사에서는 이제 다양한 테러 방법을 모색했다.
불을 낸다거나 안 좋은 입소문을 내거나 텃밭의 작물을 망가뜨리곤 했다.
빌라는 할머니와 입주민들에게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빌라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쳤다.
전기 일을 하는 정씨가 빌라 곳곳에 CCTV를 달았다.
신문 기자쪽에 발이 넓었던 박씨 아저씨는 인맥을 동원해 할머니 편에서 기사를 쓰고 여론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빌라를 만만하게 봤는데 신문 기사까지 나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대체 저 빌라는 뭘 믿고 저리도 버티는 걸까.
박씨는 경숙에게 제대로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잠시 흔들렸어.”
“당신없이는 못산다는거 나 알아..”
이 냉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아빠를 오랜만에 보는 딸은 아빠에게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못이기는 척 남편을 받아주었다.
미움이 완전하게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그토록 헌신했던 남편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갑자기 뭔가에 홀렸는지 귀신이 씌였는지 모를일이었다.
남편에게도 뭔가 일탈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을 대신하여 집안일을 돌보던 그 시기를 통해 다른 시각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과정 없는 연애의 본편이 그리웠을 수도 있었다.
*
박씨는 술을 깨러 잠시 내려왔다.
옥상에서 담배를 피웠다가는 3층 인지를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웠다.
그 처녀는 눈빛만 마주쳐도 소름이 돋았다.
뭔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복숭아 향이 나는 전자담배를 켰다.
미정은 음식물을 버린다고 잠시 일어섰다.
나중에 다 정리하고 내려가지 유난이었다.
경숙과 정씨는 두산의 광팬이었다.
TV에서는 마침 두산 경기 하이라이트와 경기분석이 한창이었다.
한쪽 구석의 박씨에게 미정이 다가왔다.
박씨는 얼른 전자 담배를 숨겼다.
박씨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담배연기인지 안개인지 모를 자욱한 연기가 둘의 주변을 감싼듯했다.
미정은 그 향기에 이끌렸는지 아주 큰 용기를 내었다.
박씨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품에 살짝 기대었다.
“매번 고마워요.”
박씨는 힐끗 3층을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3층에서 나는 TV 소리에 청각이 예민해졌다.
아직 한창 두산과 야구단의 미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캐스터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순간을 박씨는 내심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번만 딱 한번만 이라도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박씨는 미정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살집이 부끄러운 듯 잠시 멈칫했다.
따뜻한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자신에게 안기며 샴푸냄새가 훅 파고들었다.
복숭아 향이 잔잔히 나는 한손으로 미정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둘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서로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라였다.
“어흥.. 아니 ...야오오옹!”
담장을 타고 호랑이가 오나타2 본넷위로 쿵! 내려왔다.
둘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 저 잠시 화장실 좀...”
박씨는 1층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미정은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을 식히고 3층으로 올라갔다.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사이는 아무도 모르는 거랬다.
목격자가 많았다.
썸까지는 탓지만 술김에 그런것도 있고 둘은 키스를 할 뻔한 분위기에서 호랑이의 방해로 황급히 자릴 뜬 상황이었다.
인지는 오나타2 안의 뒷자리에 누워서 숨죽여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랑이는 그런 인지를 찾아 차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지하 창문의 빼꼼한 틈으로 혜정이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미정이 잘못했다.
하지만 경숙의 걱정만큼 아주 아주 매우 심각한 결론까지 간건 아니었다.
물론 키스를 했다면 극의 결말이 아주 흉악했을 수도 있었다.
만약은 없었다.
그 문턱에서 둘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멈추었다.
호랑이 덕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잠시 집을 떠나는 박씨에게 미정은 손을 흔들었다.
미정은 미정 나름의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수미는 배달을 하며 백조빌라가 나온 신문기사를 들고 동네의 할머니 할아버지 한분 한분을 찾아가며 신문을 날랐다.
용역들이 진을 치고 몰려왔을 때는 지역의 오토바이 배달 기사들을 100명 모아서 혼쭐을 낸 적도 있었다.
수미를 선두로 오토바이 100여대가 소음을 내며 용역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약간은 코끝이 찡하기도 한 명장면이었다.
마치 기병대의 선봉에 선 검은색 잔다르크 같은 모습으로 수미는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페 남자 사장님은 수미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경숙은 동사무소에 신문을 들고가 각과의 과장들과 민원인들에게 내용을 알렸다.
미정은 동네 카페를 돌며 신문을 펼치고 지방 방송에 열을 올렸다.
여론전에서 동네 사람들을 하나둘 백조빌라의 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건설사를 욕하는 여론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빌라 사람들은 합심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순찰을 돌거나 CCTV를 지켜보며 백조 빌라를 지켜냈다.
불을 지르려는 사람을 찾아서 다같이 소화기를 꺼내들고 불을 끄기도 했다.
인지와 혜정은 옥상에서 할머니의 텃밭을 지켰다.
바닷가에서 발사하는 불꽃놀이 세트를 구비해 두었다.
밤에 몰래 들어와서 농작물을 헤치는 사람에게 마구 쏘았다.
텃밭은 붙꽃 축제장이 되었다.
건설사 입장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처지가 안되었다.
수단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입구쪽에 차를 세워두고 덩치들 10명이 진을 치고 대기했다.
어쩐일인지 경찰들도 출동했다가 슬쩍 보고 지나쳐가기 일쑤였다.
건설사에서 경찰쪽에 미리 힘을 써둔게 분명했다.
위압적인 분위기를 통해 빌라의 입주민들을 하나하나 괴롭혀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백할머니가 폐지를 주워 구루마에 실어 좁은 차와 입구 사이로 들어오려다 덩치들에게 제지 당했다.
밀쳐진 백할머니는 넘어지며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할머니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이고야”
그런 할머니를 지키려 빌라의 모든 사람들이 뛰쳐 나왔다.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다.
혜정과 수미, 인지와 수현, 박씨와 정씨도 합세했다.
어쩐일인지 바로 앞 카페의 사장님까지 나와서 용역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상추를 던지고 그릇들을 던졌다.
고기도 나와서 멍멍 짓어대었다.
빌라의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할머니는 왠지 모를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하지만 이대로 더 이상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소리쳤다.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할머니는 결심을 했다.
모두를 평상에 불러 모았다.
처음이었다.
백조빌라의 모든 백조들이 모였다.
“여러분 이제 그만 애씁시다.”
“빌라는 팔기로 했어요.”
“이제 그만합시다 여러분...”
홍할머니는 빌라를 팔기로 했다.
뒤편의 땅까지 함께 파는터라 대지 지분이 상당히 컷다.
홍할머니는 손수 편지를 하나씩 적었다.
동네 사람들 누구도 모르게 옆동네로 이사 계획을 세웠다.
홍할머니는 사실 오래전부터 계획이 있었다.
옆 동네의 신축 빌라를 통째로 매입했다.
각자에게 쓰여진 편지에는 이사 날짜와 들어갈 호실이 몇호인지가 적혀있었다.
아무런 징조도 예고도 없이 이사짐 센터에서 차들이 왔고 빌라 사람들은 하나둘 이주하기 시작했다.
우선 무릎이 좋지 않은 백할머니는 101호에 입주했다.
아이가 있는 경숙네는 102호, 수현은 그대로 201호 수미도 그대로 202호 였다.
수미 부모님은 301호에 모셨고 치료비를 지원해주었다.
인지는 혜정과 함께 302호를 배정해 주었다.
301호였던 미정네는 아빠가 있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미정은 경숙을 꼬옥 안아주며 잘 살라고 인사해 주었다.
박씨도 정씨에게 악수하며 서먹한 듯 인사를 나누었다.
“형님놀러 갈게요. 그때 술한잔 해요.”
“그래. 놀러와.”
미정은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할머니”
눈물을 흘리는 미정을 더 꼭 안아주는 홍할머니.
홍할머니는 작은 선물이라며 부부 잠옷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부부 사이를 굳건히 가져가라는 덕담을 잊지 않았다.
그 잠옷 밑에는 아이들 이름으로 통장과 도장이 2개씩 있었다.
수현과 인지는 같이 동화책을 쓰기로 했다.
삽화와 작가 파트를 따로 맡기로 했고 주인공은 백조빌라의 호랑이 였다.
백조빌라에 사는 호랑이 같은 고양이가 백조 한 마리 한 마리의 고민을 들어주고 멋진 강아지 기사와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 였다.
인지와 혜정은 같이 살기로 했다. 호랑이를 같이 보필하기로 합의 했다.
혜정은 보컬학원에 등록하고 정식으로 노래를 배워보기로 했다.
한국인지만 흑인의 소울이 나오는 그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주었다.
혜정이 나온 고아원에 할머니는 혜정의 이름으로 거액을 후원했다.
고아원을 자립하여 나오는 아동들에게 자립자금을 정책적으로 시기에 맞게 지원해주는 사업에 쓰일 후원금이었다.
만약 혜정이 대학을 간다면 할머니께서 학비를 책임져 주기로 약속해주셨다.
수미는 카페 사장과 같이 신혼집을 차리기로 했다.
배달을 하며 그 카페만큼은 자주 들어가서 사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게 큰 도움이 되었다. 카페 사장님은 그간의 정과 대화도 있지만 수미가 멋지게 오토바이를 타며 누비던 그 모습에 푹 빠졌다.
어차피 재개발로 인해 자신의 커피숍도 다른곳으로 이전해야 했다.
둘은 작은 책방 겸 커피와 디저트를 파는 카페를 같이 꾸려가기로 약속했다.
수미는 오토바이를 그만 타기로 했다.
모든 것이 정리 되었고 백조빌라는 허물어 졌다.
건설사 사장의 눈가에 환희가 흘렀다.
백조빌라 위로는 아마도 아주 높은 아파트가 지어질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크루즈 여행을 떠날계획이다.
할머니가 딸에게 투자한 투자금 덕에 새벽 배송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키며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백조 빌라의 이야기는 예쁜 동화책으로 만들어졌고 수미네 북카페의 창문에 고이 놓였다.
흑석동 사람들은 악명 높은 백조빌라를 서서히 잊어갔다.
백조빌라는 우리 사는 사회라는 용광로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었다.
서로 다른 돌과 쇠가 녹아가며 서로 아우성을 치는 치열한 우리의 밑바닥이었다.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각자의 삶이 깍여 나가며 순수하고 단단한 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서울 한가운데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가장 낮은 곳을 헤쳐나아가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뜨거움을 견뎌낸 백조들은 스스로를 지키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