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 좀요.

(웹소설)

by WineofMuse

3월 5일

가영의 생일이었다.

이제는 몇 번째인지 세고 싶지 않아 졌다.

몇 번째 생일이었다 보다는 아무튼 생일이었다가 좀 더 익숙하다.


결혼한 지 10여 년이 넘어가니 부부의 생일은 차츰 중요도가 낮아져 갔다.

두 아이의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친정엄마 생일 그다음 순번 정도의 비중이랄까.

아이들이 커가면 아마도 아이 친구의 생일이 더 중요해질 날도 올 것 같았다.


가족들끼리 밥은 미리 지난주 수요일에 먹었다.

엄마도 언니도 남편도 서로의 시간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가영의 입맛은 딱 초등학생 입맛이다.

피자와 햄버거, 족발, 생일만이라도 이런 음식 먹으며 맥주 마시고 방안에 널브러지고 싶었다.

25번째 다시 보고 있는 도깨비나 30번 정도 다시 보는 선덕여왕을 보면서 족발에 맥주를 줘 패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가스가 나오는 횟집에서 식사를 했다.

남편과 엄마는 회를 참 좋아하지만 가영은 안 익힌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매년 생일 때마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주던 남편도 오늘은 잊은 듯하다.

늦어가는 저녁 즈음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은 미역국 해줄까?"


남편에게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도 잊은 적이 많으니까.

가영도 이제는 그런 사소한걸 문제 삼을 나이는 아니었다.


"아냐."

"요즘 비비고 미역국 너무 많이 먹어서 물렸어."

"와인이나 한잔할까?"

"언제 들어와?"

"응 아직 정리좀 하고 들어갈게."

"금요일이니까. 차 좀 막히는 거 감안해."

"응."


온다는건지 만다는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이들의 저녁을 챙기고 씼겼다.

로션 발라주고 머리 빗겨주고 조금 놀아주니 금세 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남긴 밥에 간단히 저녁을 때웠다.

설거지가 어느 정도 있어 살짝 고민스러웠다.

지금 해야 하나... 남편에게 부탁해볼까...

낮시간에 신나게 논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재밌는 이야기 속닥이며 키득거리다 잠들었다.


설거지를 다하고 샤워도 마쳤다.

11시가 다되어 가는데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기를 들어 1번을 길게 눌렀다.

신호가 가려는 찰나 현관의 번호키가 눌린다.


'삐삐 삐삐삐 삑 삐삐'

'털컥'


"왔어?"

"응."

"수고 많으셨어요."

"밥은?"

"먹었어."


누구와 어디서 왜가 생략되었다.

오래된 부부는 굳이 서로의 동선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남편 인지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미식가이기도 하고 책 읽기나 글 쓰는 게 취미인 사람이었다.

운동신경은 제법 있었지만 부상의 우려 때문인지 격한 운동은 지양하는 편이었다.


"참 자기 몸 하나는 끔찍이도 챙긴다."


연애할 때는 그런 인지가 완벽해 보였다.

적당히 마른 몸매와 잔근육 식단관리도 꽤나 열심히였다.

무엇보다 남편의 까다로운 식성 덕에 못 먹어본 갖가지 음식과 전국의 식당을 돌아다니는 건 큰 재미였다.


샤워를 마친 인지는 하얀 반팔티와 잠옷 바지를 입고 나왔다.

눈은 휴대폰에 있었다.


"와인은?"

"응? 집에 있는 거 따자."

"응. 와인 한잔 하자길래 사 오는 줄 알았네."

"집에 있는 게 칠링도 잘 돼있고."

"아껴."

"응..."


"화이트?"

"응."

"리슬링 그랑크뤼 하나 남았네?"

"아 그거 말고 다른 거"

"이건왜?"

"아 누구 주기로 했어."

"누구?"

"응 있어."

"이거 맛있는데..."

"그럼 쇼블? (쇼비뇽 블랑)"

"응."


혼자 이것저것 챙기는데 핸드폰만 바라보는 남편이 살짝 야속했다.


"잔좀 세팅해줘... 요.."

"치즈는?"

"저번에 먹던 거 있어."

"훈제한 거."

"응."


못 보던 와인 오프너가 생겼다.

'하여간 장비 욕심은..."


"꼴꼴꼴"


와인이 경쾌하게 따라졌다.

남편은 치즈와 몇 가지 비스킷이 대충 올라간 플레이트를 내려두었다.

앉기 전 가영의 이마인지 정수리인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가영은 입술을 샐쭉 내밀어 본다.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 남편은 가볍게 입을 맞춘다.


"쪽"


같은 바디 워시를 쓰는데 오늘따라 살짝 향이 다르게 느껴졌다.

미묘한 향수 뉘앙스가 남편을 더 싱그럽게 했다.

이인 참 늙지도 않나.

내 거지만 잘 참 잘났다.

오래 봐도 참 날로 멋지게 나이 들어간단 말이지.

늦은 저녁이면 까끌하게 나와있는 수염과 살짝 깊어질 주름은 무언가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젊은 날의 리처드 기어를 나이 든 리처드 기어가 잘생김으로 이기는 그림이 생각났다.


조명을 한 톤 낮춘 거실에서 와인을 한잔씩 따랐다.

식탁에서는 핸드폰을 쳐다보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인지의 눈이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볍게 언질을 줄 생각이었다.


"여..."


잽싸게 핸드폰을 소파로 던지는 남편을 보며 말을 이어가지 않는다.

먼저 스월링을 한 후 향을 맡은 남편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짠."

"네 생일 축하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맞다 음악."

"지니 야 음악 켜줘"


- 네 알겠어요.


평소에 즐겨 듣는 음악이 들려왔다.


"지니 야 볼륨 낮춰."


- 네 알겠어요.


이제야 조명과 음악이 완벽하게 세팅되었고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고요와 평안이 찾아왔다.


아이들이 눈을 뜨고 유치원과 학교에 가고 돌아오고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남편과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순간과 시간이 소중했다.

여느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하루 중 가장 편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생일이지만 서로 생일 선물을 주고받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언제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이거 생선."


이러고 말았다.


인지가 평소답지 않은 억양으로 가영을 불렀다.


"가영아"


눈으로 끄덕하는 가영


"이거 쇼비뇽 블랑 아닌데?"

"응?"


가영이 라벨을 다시 보니 샤르도네다.


"맛보니 아니더라고."


"이걸 어떻게 구분해?"


아.. 쇼블은 구분하기 쉬워. 향의 개성이 너무 뚜렷해."


"가영아"

"응?"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왔다.

남편은 늘 이런 농담을 시답잖게 던지곤 했다.

누구?라고 물어보면

"너" 라던가 딸아이의 이름을 붙이곤 했다.

어딘데? 물어보면

"니 맘속" 이런 식이 었다.

남편의 실없는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자고 맘먹은 가영.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지를 바라보았다.

[그런 농담 한두 번이니 인간아 히히]


"누군데?"

"나영이 엄마"


"응?"

"갑자기 언니는 왜?"


딸아이의 베프인 나영의 엄마. 미정언니였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게 이상했지만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황 파악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언니는 왜?"


"나영 엄마가 좋다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미정 언니라고?"

"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가영


"아저씨 오늘 무슨 개그가 이래?"

"가영아"

"응"

"나영이 엄마가 좋아."

"???...???"


침묵이 이어진다.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이내 이런 유의 농담이 지겹다는 듯 다시 한번 농담으로 유도해본다.


"미친 히히..."

"농담도 참..."

"미안해"


"뭐가?"

"뭐가 미안한데?"


[너 진심으로 미안한 거면 내 손에 죽는다. 히히]

[이를 꽉 깨문다.]


"......"

"좋아졌어."


순간 이성이 날아갈 것 같은 가영.

와인을 한 번에 다 털어 넣었다.


"무슨 전개가 이래?"

"미쳤어?"

"진심이니??"

"그 언니는 네가 좋대?"


반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이 와인을 홀짝인다.


자전거에 치이면 굉장히 아프지만 초고속 기차에 정통으로 치이면 육신은 물론 정신도 가루가 되어 아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가영은 오늘 제대로 치였다.

순간 12시가 딱! 넘어가며 플립 시계의 한두 장이 '찰칵' 넘어갔다.


가슴속에 "덩!!!" 하고 아주 울림이 깊고 무거운 종이 울렸다.

남편이 딴 여자가 좋아졌다고 고백했다.

딸아이의 친구 엄마 미정 언니를 말이다.

소시오패스였나?

남의 아픔 따위 아무렇지 않아?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지?

그리고 뭐 이리 당당하게 말해?

심지어 목소리를 떨지도 않았어.


남편은 마치 마트에서 와인 한 병 고르듯 말했다.


"여보 이 와인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다."


딱 이 정도의 뉘앙스였다.

가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천 가지, 만 가지 상상의 나래가 휘몰아쳤다.

이 혼란스러운 모든 상황을 하나씩 정리해야 했다.

결론적인 본심이 가장 앞서 튀어나왔다.


"잣니?"


"아직"


"아...."

"아... 아직?????"

"진심이니?"


둘째를 낳은 지 6년이 되었다.

성욕은 바닥을 쳤다.

매번 몸이 안 좋다, 아프다, 다음에, 를 반복하며 남편을 외면하긴 했다.

반년에 한번 정도는 부부관계를 이어왔다.


"섹스가 문제야?"

"응 그것도 문제 중 하나긴 하겠지."


"아니.. 뭐 이리 담담해?"


***


남편은 가끔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하고 조르기도 했다.


"가영아 나 너무 아껴주는 거 아니니?"

"이러다 바람난다?"

"그러든가. 히히"

"하아..."


그깟 섹스야 다음에 하면 되지 뭐.

애들 키우느라 집안일이 바쁜 게 뭐 나 혼자만의 문제인가?

오전에 필라테스도 다니고 간혹 오후에는 점핑도 다녔다.

나름 몸매에 자신 있었고 건강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남편과 즐겁고 뜨거운 밤을 만들어 낼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너무 같이 오래 살았어...]


"병원을 가보는 게 어떨까?"

"아냐 뭘 이런 걸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볍게 넘겼다.


"여보. 혼후 순결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다."

"그건 무슨 말이야?"

"혼전 순결이 아니고?"

"응."

"결혼하고 나서 순결 지키는 부부가 많대."

"우리도 그렇네"

"히히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우리 이야기 같은데 뭘."


삐죽 튀어나온 남편의 입술에 쪽 키스를 했다.


"설거지 좀 부탁해요."


***


결말이 이런 건 곤란했다.

남편 새끼는 대체 뭘 하다 그 언니랑 눈이 맞은 걸까?

당장 전화기를 들고 싶었지만 그 언니보다는 남편에게 묻고 싶은 게 더 많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미친 상황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영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짜내며 소리를 질렀다.



"오늘 내 생일이라고 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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