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ineofMuse Feb 10. 2022
코로나 생계자금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대출을 해준다 했다.
정말 치사했다.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이자도 있고 일반 은행에서 줄을 서야 했고 까다롭게 서류를 구비해야 했다.
그리고 갚지 않으면 추심이 들어올 것이다는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2,500만 원 대출받아 밀린 그간 처형 급여와 보험대출부터 우선 갚았다.
코로나로 본업이었던 프로모션 마케팅 대행사는 더 이상 운영하지 못하고 월 100만 원씩 월세만 내고 있었다.
직원들은 각기 살길을 찾아 나섰고 퇴직금을 정산해주고 나니 법인 통장은 홀쭉해져 있었다.
사람을 못 만나니 모든 공연과 전시회, 축제가 취소되었으며 수많은 업체가 줄도산했다.
그 수많은 도미노 속에 나의 회사도 반쯤 걸터앉은 채 같이 쓰러졌다.
1년을 버티던 처형이 드디어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본인의 길을 찾아가기로 하셨다.
셋이서 1년은 아옹다옹 버틴 것도 용했다.
누가 누굴 탓하거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고 황당무계한 사건들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졌었다.
절대 가족과 함께 일하지 말라는 주옥과 같은 격언은 절대적인 진실이었다.
주변에 혹시 가족과 함께 일하는 매장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이미 속이 썩어 문드러구나 생각하면 된다.
12월 말까지 일을 마치고 처형은 나갔다.
와이프와 나는 1월 1일부터 단둘이 매장을 운영하기로 했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와이프와 나는 거의 20년 차 부부다.
어린 나이에 만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서로 의지하며 전우처럼 뭉쳐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낸 사이이다.
그래서 지금은 진짜 형제애와 전우애로 똘똘 뭉친 전우가 되어버린 게 문제이긴 하다.
전투력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부부의 내전은 어느 때보다 격렬했고
휴전의 수단이 없던 우리는 더 치열하게 전투에 임할 따름이었다.
아들과 딸은 나름 건강히 잘 자라주었고 쌀 국숫집을 하고는 외할머니가 저녁 시간과 주말에
봐주기로 하였다.
월 90만 원을 할머니 용돈으로 드리니 시급으로 따리면 참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쌀 국숫집에서 버는 것에 비하면 부담이 없다고 하기에는 또 무리가 따르는 금액이었다.
각 가정에 돈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어딨으랴
특히나 아이들이 크고 있는 집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스트레스가 다른 곳으로 발현되어 터져 나왔다.
우리는 갑자기 삶의 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각자 회사를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를 그리워했다.
저녁이 있고 주말 이틀씩 무조건 쉬었던 그때의 우리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아이들과의 시간도 소중했고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며 일요일은 정기적으로 쉬었다.
저녁을 꼭 같이 먹고 싶었다.
저녁 6시에는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
오전 11시에 오픈해서 오후 6시에 닫으니 점심 장사만 하고 저녁 장사는 포기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삶의 질은 나아졌지만 매출이 점점 형편없어지기 시작했다.
월 매출이 1,000만 원 이하를 웃돌았고 둘이 한 달을 일하고 셈해보니 100만 원도 못 가져간다는 계산이 나왔다.
우리는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다툼이 잦아졌고 싸우더라도 크게 싸우게 되었다.
하나하나 열거할 수도 없이 사소하고 신선한 소재를 찾아가며 싸운듯하다.
좁은 매장에서 둘이서 싸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
종국에는 프라이팬 하나를 힘껏 내리쳐 망가뜨리고 말았다.
우그러져 못써버린 프라이팬처럼 점점 생명이 꺼져가는 쌀 국숫집에는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갈 여력이 없어 보였다.
이 싸움을 그만둘 다른 이유를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