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말버릇인지 추임새인지 말끝마다 특유의 신음을 냈다.
쓰읍...
자 한 줄씩 따라 해 봐.
“저 붉은 태양 아래:
쓰읍...
“저 붉은 태양 아래”
“시들어 가는 꽃 한 송이가”
쓰읍...
“시들어 가는 꽃 한 송이가”
한지가 발라졌던 흔적만 남은 여닫이문의 살 너머 성의 없는 교육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
문 너머로 꼬질함을 넘어 까매지기 직전의 작은 아이 하나가 종이를 든 채 중얼거리고 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탓에 모르는 글씨가 태반이다.
뻐드렁니에 얼굴뼈가 한쪽으로 쏠린 고구마같이 생긴 땅딸막한 사내가 느릿느릿 목소리를 돋궈가며 일러준다. 아이는 뭔가를 알아들은 듯 주억거리지만 사실 머릿속이 하얗다.
사내는 친절했지만 내용은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고 자꾸만 얼굴이 과자봉지에 그려진 고구마를 닮았다는 생각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훗날 그 형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사건도 있었지만 그 정도의 인연을 첫 만남에서 감지할리는 없고 그저 재미나게 생긴 형이라는 사실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내일까지 못 외우면 문수형한테 반 죽으니까 외우는 게 좋아야.”
떳떳하지 못한 자칭 신문사의 사주는 가명인지 별명인지 모르겠지만 박문수라 불렸다.
맞다. 그 어사 박문수 말이다. 허리춤에는 늘 가스총을 차고 다녔는데 부하들은 마치 마패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목격한 폭행은 그 수위가 상당했다. 사람이 주먹으로 맞을 때 꽤나 섬뜩한 소리가 난다는 것을 처음 들어본 곳이기도 했다.
대구의 Y 대학교 내리막 사거리 육교 옆의 쓰러져가는 판잣집이었다.
내 또래의 아이도 있었고 대부분 15살 미만의 아이들이 스무 명 남짓 방 두 개에 포개지듯 잠을 청하는 곳이었다.
어쩌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곳 ‘신문사’에 취직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하기에는 성립이 안되고 납치되었다고 하기에는 감언이설에 속아 따라간 나의 과실도 상당하다 여겨진다. 노동법 따위가 있었을진 몰라도 음험한 영역까지 미치긴 시기상조였을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곳은 전국의 부랑아들을 잡아다가 신문을 팔게 하고 그 수익을 갈취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곳이었다.
신문이 발행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전에 30부 오후에 50부를 팔아야 했다.
점심 한 끼 만을 제공했고 그마저도 매일이 라면이었다.
당연하게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에 해당하는 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1부에 500원을 받았으니 당시의 가판대 신문값이 200원임을 감안하면 250%의 폭리에 가까웠지만 버스 승객들은 꽤나 신문을 사주곤 했다.
나름의 감성이 깃든 신문이었는데 무임승차를 한 꼬마들의 덧없는 연설을 듣고 무릎에 놓인 신문 대신 동전이나 지폐를 대신 건네면 되는 간단한 구매 절차가 뒤따랐다.
드라마 카지노에 나왔던 최민식의 어린 시절 신문팔이가 서울 올림픽이 지난 90년 초까지도 성행한 걸 보면 지방은 서울에 비해 확실히 굼뜬면이 있다.
어사 박문수의 성격이 상당히 급한 편인지 이틀 만에 판촉사원이 되어 옆구리에 30부의 신문을 끼고 버스에 올랐다. 일종의 데뷔 무대인 셈인데 무대치곤 꽤나 생소하기도 했고 준비도 상당히 미흡했기에 심장만 벌렁거릴 뿐 마땅한 대책도 각오도 없는 상태였다.
22번인지 28번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십 번대의 버스로 기억된다.
천장의 버스 손잡이에 손가락 끝을 걸고 섰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이 지나며 뒷문이 치이익 소리를 두 번 세 번 내고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설 때까지도 입을 떼지 못했다.
아랫입술은 중력의 영향을 극심하게 받듯 일그러지며 바닥을 향했고 목구멍은 돌연 침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듯했다. 정수리가 버스 바닥에 닿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고개를 처박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간신히 끄집어내었다.
“저 붉은 태양......”
다섯 글자를 귓속말처럼 중얼거리곤 휘청거리며 예닐곱 정도 되는 승객의 무릎에 던지듯 신문을 내려두었다.
판매품을 고객에게 전달했으니 이제 2부에 해당하는 연설을 마저 해야 한다.
“목이 마른 사슴이... 우물”
두 마디를 넘기지 못했다. 터져버린 가슴은 허하다는 심정을 넘어서 늘어진 대로 늘어난 풍선처럼 흐느적거리며 공기를 가쁘게 들이켰다. 들이켜도 들이켜도 가빠진 숨에 산소는 희박해지기만 했다.
신문대신 동전이나 지폐가 손에 쥐어져야 소기의 매출이 발생하겠지만 당연하게도 성과는 없었다. 불쌍함을 한껏 발휘해야 할 자리에서 실력을 제대로 못 보인 셈이다. 몸 둘 바를 모른 채 배배 꼬고 있는 나를 곁눈질했을 승객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최초의 프레젠테이션을 망쳤음에 아파하기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이 동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모종의 배신감과 실망감이 수치심으로 변했다.
‘삐이이익’
빨간색 하차 스위치가 비명을 질렀다.
의자 위의 신문들을 훔치듯 옆구리에 끼우곤 인사도 잊고 서둘러 날듯이 뛰어내렸다.
쨍한 햇살을 피해 상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9시에 들고 나온 빳빳한 신문 30부에는 새 코트에서 나는 듯한 두터운 잉크 냄새가 스믈거리며 올라왔다. 오전에 팔아야 할 30부 15,000원을 입금하지 못하면 장부에 마이너스가 그어지고 빚이 생기는 구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문의 유통기한은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다음날 다른 정보 혹은 날짜가 찍힌 신간에 밀려 순식간에 변소의 휴지나 완충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돈을 만들지 못했다는 좌절감보다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거대한 폭행 앞에 송두리째 놓일것이라는 상상에 기절할 것 같은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다시금 용기 따위를 내어 다음 버스를 탈 게 아니라 버스에 치이는 편이 쉬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었다.
“저 붉은 태양 아래 시들어 가는 꽃 한 송이가 피어보려 피어보려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 누구도 보살펴 주지 않는 고아, 고아였던......”
금호강 아양교 너머로 무섭도록 빨간 석양이 길게 뻗었다.
신문 뭉치를 한번 더 가슴 안으로 당겨 껴안았다. 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