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선스 전쟁 너머, 금융 패러다임의 전환점
은행의 가장 큰 자산은 ‘신뢰’다. 100년 넘게 국민의 검증을 받아온 시스템이자, 금융의 최후 보루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지금 그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디지털 통화가 중심에 서면서 전통 은행들도 기존 질서를 다시 쓰고 있다. JP모건 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 미국의 주요 대형 은행들은 이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하며, 공동 발행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 논의에 착수했다. 여기에 실시간 결제 네트워크 클리어링하우스와 P2P 결제 서비스 얼리워닝서비스(Early Warning Service)까지 참여하면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실험이 아닌 새로운 통화 질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리플(Ripple), 서클(Circle) 같은 민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국가 은행 라이선스 신청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미국은행협회(ABA) 등 전통 은행 협회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신탁 기능 없는 기업에 은행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시스템 리스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작 대형 은행들마저 디지털 통화 생태계로 진입하고 있는 이 시점에, ‘은행’의 정의는 과연 예전 그대로일 수 있을까?
신뢰는 과거의 유산이지만, 이제는 기술과 투명성 위에 다시 쌓아야 할 가치가 되었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충돌은 단지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금융의 철학을 다시 쓰는 순간이다.
2025년, 미국 금융권은 조용한 전쟁터가 되었다. Ripple과 Circle, 그리고 수백 개의 디지털 자산 기업들이 미 통화감독청(OCC)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코인을 발행하는 사업자가 아니라, 이제는 '은행'이 되기를 원한다. 아니, '스테이블뱅크(Stablebank)'가 되기를 원한다. 이 변화는 단지 라이선스를 얻기 위한 기술적, 행정적 절차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금융의 패러다임 자체를 다시 쓰겠다는 선언이다.
기존 은행들은 당황했다. 미국은행협회(ABA)와 독립은행가협회(ICBA)는 OCC에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 Ripple National Trust Bank나 Circle 같은 기업들의 은행 인가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주장한다. "이 기업들은 전통적인 수탁 의무를 충족하지 못하며, 이는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디지털 자산 기업들은 그 자체로 '자금 흐름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Circle의 USDC, Tether의 USDT, 그리고 최근 PayPal이 발행한 PYUSD까지. 이들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송금, 탈중앙화 금융(DeFi), NFT 거래, 온라인 커머스 등에서 점점 더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단순한 '암호화폐 플랫폼'이 아니다. 수십억 달러의 리저브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국채, 예금, 금융상품 등으로 운용하고 있다. 수익 모델은 이미 존재하며, 그 구조는 기존 상업은행과 흡사하다. 다만 차이는 있다. 이들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전통 금융의 느리고 복잡한 인프라 대신, 스마트 계약과 글로벌 결제 인프라를 활용한다.
이제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다.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동일한 인가를 달라."
유럽은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있다. EU는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은 반드시 은행이나 전자화폐기관(EMI)만 발행할 수 있도록 명확히 규정했다. Circle은 이에 대응해 유럽 전역에서 EMI 인가를 취득했고, PayPal도 유사한 전략을 택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프랑스의 Societe Generale 은행이 자체적으로 유로 기반의 스테이블코인(EURCV)을 발행한 것이다. 즉, 유럽은 "기존 은행들이 직접 발행하거나, 발행을 통제하라"는 메시지를 정책으로 만든 셈이다.
이는 한편으론 진입장벽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론 제도권 안에서 스테이블뱅킹 시대를 제어하려는 시도이다. 민간과 제도, 블록체인과 규제, 혁신과 신중함 사이의 절묘한 균형이다.
스테이블뱅크는 단순한 '은행화된 코인기업'이 아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속성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금융기관이다:
법정화폐 기반 토큰 발행 및 환매 가능
실시간 송금 및 결제 네트워크 보유 (온체인 + 오프체인 연동)
자체 리저브 운용 및 투명한 회계 감시 구조
스마트 계약 기반의 자동화된 금융 서비스 제공 (예: 예치, 대출, 청산)
글로벌 접근성과 소액 자산 사용자 포용성
이러한 구조는 전통 은행의 약점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느린 송금 시스템, 높은 수수료, 비효율적인 유통 구조, 낮은 투명성, 낮은 접근성. 이 모든 것을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뱅크가 해결하고자 한다.
Ripple, Circle, Paxos,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천 개의 프로젝트들이 이제 스테이블뱅킹 시대의 전초부대가 되고 있다.
이제 기존 금융회사, 특히 글로벌 은행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위협으로 보고 배제할 것인가, 아니면 파트너로 받아들여 함께 진화할 것인가.
일부 은행은 이미 전략을 바꿨다. 스테이블코인 기반 크로스보더 송금 사업에 참여하거나, 직접 스테이블토큰을 발행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금융당국과 로비를 강화하며 암호화폐 기업의 은행 진입을 막기 위한 노력도 강화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금융이 단지 은행의 독점 영역이었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기술, 토큰, 네트워크, 글로벌 접근성, 그리고 신뢰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은행이 부상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곧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을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은 아직 미완성이며, 스테이블뱅크라는 개념 자체가 제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간과 은행권, 핀테크 기업, 일부 규제 당국의 실증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OBDIA(오픈블록체인DID협회)의 스테이블코인 분과, 은행 중심의 파일럿 프로젝트, 그리고 디지털화폐 관련 제도 준비 작업은 한국형 스테이블뱅킹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Ripple과 Circle의 은행 인가 논쟁은 단순히 라이선스를 둘러싼 충돌이 아니다. 이것은 금융 인프라의 운영 주체가 누구이며, 금융의 신뢰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거대한 문명적 논의다.
기존 은행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신뢰는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기술 기반 기업들이 제공하는 투명성과 효율성, 접근성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스테이블뱅킹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누가 이 새로운 금융 질서를 설계할 것인가. 누가 그 중심에 설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 흐름에 참여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이상 먼 미래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결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