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RP로 전통과 혁신을 결합하다
2010년대 초반, 핀테크의 등장은 은행 중심의 금융 패러다임을 흔들었다. 당시 전통 금융사들은 스타트업과 제휴하거나 직접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변화에 적응했고, 그 결과 모바일 뱅킹·간편 송금·P2P 투자 등 새로운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됐다.
그리고 2020년대 중반, 비슷하면서도 더 큰 파급력을 지닌 **암호화폐(가상자산)**가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블록체인 기반 송금, 토큰화 증권 등 디지털 자산이 전통 금융의 핵심 수익원을 직접 겨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SBI그룹, 미국의 코인베이스, 한국의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보여주듯, 이제 금융사들은 “무시”와 “참여”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일본 금융 대기업 SBI그룹은 전통 금융이 암호화폐를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대표적 사례다.
하이퍼 예금(Hyper Deposit): 2025년 9월 출시된 이 서비스는 엔화 예금 계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계좌 개설 시 XRP 보상을 지급한다. 고객은 SBI 신세이은행과 SBI 증권 계좌를 연동해 매매 자금을 수시로 이동시킬 수 있고, 세전 연 0.42% 금리를 제공해 기존 최고 금리(0.40%)를 웃돈다.
리플(Ripple)과의 오랜 협력: SBI는 2012년 리플에 투자해 현재 9%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6년 합작사 SBI 리플 아시아를 설립해 아시아 송금 서비스를 확대했다. 2021년에는 XRP 기반 국제 송금을 일본 최초로 도입해 송금 비용 절감과 속도 혁신을 실현했다.
디지털 자산 확장: NFT 마켓 xrp.cafe를 통해 창작자들에게 XRP 보상을 제공하고, 2025년에는 리플의 RLUSD를 일본 시장에 도입할 계획이다.
SBI의 행보는 단순히 암호화폐를 상품화한 것이 아니라 예금·증권·송금·NFT까지 포괄하는 금융 플랫폼 전략으로 읽힌다. 은행 계좌에 XRP 보상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예금’은 전통 금융이 디지털 자산을 내재화하는 첫 실험대다.
미국 최대의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Coinbase)는 이미 전통 은행을 위협하는 슈퍼앱 전략을 실행 중이다.
다변화된 수익 구조: 2025년 기준 코인베이스의 매출 구성은 △거래 수익 51% △스테이블코인 22% △블록체인 리워드 14% △대출 및 이자 6% △ETF·구독 8%로 나타난다. 단순 거래 수수료 의존을 벗어나 스테이블코인 결제·대출·투자 상품을 통해 종합 금융사로 진화하고 있다.
규제 명확화의 수혜: GENIUS 법안 통과로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명확해지면서, 코인베이스는 USDC 기반 결제망을 강화하고 탈중앙 대출 프로토콜을 앱에 통합하는 등 은행 대체 계좌로의 입지를 확대 중이다.
코인베이스는 단순히 가상자산을 사고파는 거래소를 넘어, 이자·대출·결제·투자를 통합 제공하며 “포스트 은행”을 표방하고 있다. 이는 핀테크를 넘어 크립토 핀테크가 실질적 금융 경쟁자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역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늦어지고 있지만, 국내 거래소들은 이미 탈중개 금융사로 변신을 준비 중이다.
국내 거래소들은 거래 수수료 중심의 기존 모델에서 벗어나 커스터디·대출·결제·토큰 증권 등으로 확장하며 전통 금융의 핵심 영역—예금, 대출, 결제—을 직접 공략하고 있다.
SBI·코인베이스·한국 거래소의 사례는 전통 금융사들이 직면한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1. 내재화(Integration)
SBI처럼 은행이 직접 스테이블코인이나 가상자산을 상품에 결합해 하이브리드 금융을 제공.
장점: 기존 고객 기반과 규제 준수 신뢰도를 활용 가능.단점: 규제 리스크, 시스템 복잡도 증가. 2. 제휴(Partnership)은행과 거래소·블록체인 기업이 협력해 커스터디·송금·결제 서비스를 공동 개발.예: 일본 SBI 리플 아시아, 미국 JP모건-코인베이스의 제한적 협력.장점: 기술·인프라를 빠르게 확보 가능.단점: 수익 분배, 파트너 리스크.
3. 경쟁(Competition)전통 금융이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거래소 라이선스를 취득해 직접 시장에 진입.장점: 데이터·수익 주도권 확보.단점: 초기 비용·규제 승인 부담, 기존 사업과의 충돌.
과거 핀테크 시대에는 제휴가 주류였지만, 암호화폐 시대에는 인수·라이선스 취득 등 보다 직접적인 전략이 늘어날 가능성이 증가할거다. 특히 스테이블코인 발행·커스터디·토큰 증권 발행은 은행의 기존 사업과 높은 시너지를 낼 수 있어, 단순 제휴를 넘어 적극적 인수합병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은 단순한 금융 상품이 아니라 자금 이동·결제·저축·투자를 하나의 디지털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기술이다. 이는 은행의 전통적 역할—자금 중개와 신뢰 제공—을 재정의하며, 포스트 은행 시대를 촉발하고 있다.
은행의 장점: 규제·신뢰·보험·컴플라이언스.
가상자산 기업의 강점: 기술·비용 구조·속도·개방성.
앞으로의 경쟁은 단순히 금리를 높이는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안전하고 빠르며 편리한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느냐의 문제다. SBI가 XRP를 예금 상품에 결합하고, 코인베이스가 스테이블코인과 대출 서비스를 통해 은행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모두 금융 데이터와 유동성의 주도권을 향한 전투다.
한국 역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마무리되면, 국내 은행과 거래소 사이에서도 내재화·제휴·경쟁이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핀테크의 시대가 은행을 ‘모바일화’했다면, 크립토 핀테크의 시대는 은행을 ‘탈중개화’할 것이다. 전통 금융사가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다음 10년 금융 생태계의 승자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