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 생활
IT기업 개발본부 부장인 후니는 서울 강남의 고층 빌딩 숲 속에 있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하늘과 끝없이 이어지는 콘크리트 건물들, 그리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 속 MZ세대 직원들의 퇴사 보고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일과 삶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수직적인 의사소통 문화가 힘들다..."
후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0년차 중간관리자로서 그가 겪는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세대 간 소통의 벽이었다.
"부장님, 오늘 오후 3시 임원회의 자료 준비는 어떻게 됐나요?"
상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후니는 흠칫 놀랐다.
"네, 곧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30분 내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후니는 서둘러 대답하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후니는 점심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회의 자료를 완성했다.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이사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임원회의 중이라..."
후니는 전화를 받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일상이 매일 반복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늦은 밤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쉴 새 없이 업무 연락을 주고받는 생활. 위에서는 실적 압박을, 아래에서는 워라밸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후니는 점점 지쳐갔다.
그날 밤, 후니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임원 승진 대상에서 제외됐어. 나이만 먹어가는데... 젊은 직원들과의 소통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끝없는 낀 세대로 살다 끝나는 걸까?'
회사의 젊은 임원들은 수평적 소통을 강조하며 빠르게 조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MZ세대 직원들의 지지를 받으며 승진하는 그들을 보며, 후니는 자신의 고민을 더욱 깊이 했다.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사십 중반의 나이로 20년 이상 한 곳에서 직장 생활을 방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2. 주말 등산과 트레킹
주말, 후니는 오랜만에 등산을 가기로 했다. 그에게 주말 산행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매주 다른 산을 찾아다니며, 잠시나마 조직에서의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었다.
북한산 정상에 오르자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미로 같았다.
"아, 이렇게 멀리서 보니 도시가 참 답답해 보이네."
후니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의 자연을 감상했다.
그때 옆에서 등산객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혹시 섬 트레킹에 관심 있으세요? 다음 주에 울릉도 트레킹을 가는데 함께 가실래요?"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이상하게도 후니는 그 제안이 끌렸다. 최근 그는 자주 생각했다. 과연 이 조직에서 임원이 되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목표인지, 아니면 다른 삶의 방식이 있지 않을지.
"네, 좋습니다. 함께 가보고 싶네요."
다음 주, 후니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했다.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 그리고 맑은 공기... 모든 것이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트레킹을 하면서 후니는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직급도, 세대 차이도 없이 모두가 이웃으로 사는 것 같아. 꼭 임원이 되지 않더라도... 이런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면 어떨까?'
3. 달라지지 않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기다
울릉도에서 돌아온 후, 후니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주말마다 여러 섬을 찾아다니며 그곳의 삶을 관찰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날, 후니는 우연히 TV에서 '스마트 아일랜드' 프로젝트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AI와 IoT 기술을 활용해 섬 지역을 현대화하는 프로젝트였다.
"이거야! 내가 찾던 거였어!"
후니는 흥분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는 즉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스마트 아일랜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 섬에서의 생활, 원격 근무 가능성 등을 찾아보았다. 15년간의 IT 개발과 관리 경험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후, 후니는 용기를 내어 회사에 원격 근무를 제안했다.
"제가 가진 IT 기술과 경험을 활용해 섬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회사의 지방 거점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상 외로 회사는 후니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ESG 경영이 화두가 된 시점에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이러한 시도는 회사의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4. 섬 생활의 불편함
몇 개월 후, 후니는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의 눈에는 설렘과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 임원 승진을 포기하는 대신 선택한 이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
섬에 도착한 후니는 자신의 새 집으로 향했다. 작지만 아늑한 집이었고,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여기가 내 새로운 집이구나."
후니는 깊은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첫 한 달은 쉽지 않았다. 도시의 편리함이 그리워졌고, 한적한 섬의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업무 미팅은 모두 화상으로 진행해야 했고,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수십 년간 유지해온 부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는 것이 힘들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건가..."
후니는 가끔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기도 했다.
5. 섬 사람이 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후니는 섬의 리듬에 조금씩 적응해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다를 바라보며 명상을 하고, 집 앞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었다. 점심시간에는 해변을 산책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IT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섬 주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스마트폰 사용법이었지만, 점차 온라인 쇼핑몰 운영, SNS 마케팅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청년들과 함께 섬의 특산물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플랫폼을 만들며, 그동안 어려웠던 세대 간 소통의 벽도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후니 부장님 덕분에 우리 섬이 많이 발전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어느 날, 이장님이 후니에게 말했다. 이제 그에게 부장이라는 호칭은 그저 친근함의 표현일 뿐이었다.
후니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이 섬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직급과 나이를 넘어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법 말이에요."
1년이 지난 어느 날, 후니는 서울에서 온 옛 동료를 만났다.
"야, 너 정말 달라 보인다! 얼굴에 생기가 돌아. 우리는 여전히 성과 압박에 시달리는데."
후니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도 모르게 변한 것 같아. 임원이 되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걸 이제야 알았어."
해질 무렵, 후니는 집 앞 벤치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만든 온라인 쇼핑몰에서 울리는 주문 알림음...
후니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찾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그리고 행복을. 그것은 바로 이곳, 직급도 세대 차이도 없이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이 작은 섬에 있었다.
"이제 난 집에 왔어."
후니는 작게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삶,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