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팔 마피아 네트워크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더 이상 헌법 조항만이 아니다.
물론 헌법은 여전히 존재한다. 삼권분립도 있고, 선거도 있고, 언론의 자유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가 어디를 보고, 무엇을 우선하며, 어떤 결정을 얼마나 빠르게 내리는지를 결정하는 층위는 이미 한 단계 위로 올라가 있다.
그 위에 얹힌 것이 있다.
법이 아니라 코드, 제도가 아니라 알고리즘, 합의가 아니라 데이터다.
미국은 지금, 헌법 위에 소프트웨어를 얹어 국가를 운영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흔히 말하는 ‘페이팔 마피아’라는 이름의 네트워크가 있다.
페이팔 마피아는 종종 과장되거나 음모론적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는 더 정확한 방식은, 미국 엘리트 권력의 세대 교체라는 관점이다.
이전 세대의 권력은 명확했다.
정치는 워싱턴, 금융은 월스트리트, 기술은 실리콘밸리.
각 영역은 느슨하게 협력했지만, 본질적으로 분리돼 있었다.
페이팔 마피아는 이 구분을 깨뜨린 첫 세대다.
이들은 금융에서 출발했고, 기술로 확장했으며, 결국 국가 권력과 직접 연결됐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정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국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에는 설계자가 필요하고, 운영체제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실행력이 필요하다.
투표는 방향을 정할 수는 있지만, 시스템을 최적화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묻는다.
“왜 국가는 이렇게 느린가?”
“왜 결정은 감정과 이념에 좌우되는가?”
“왜 기술은 있는데, 통치는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가?”
이 질문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흐름을 트럼프라는 인물 하나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트럼프는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깨는 사람이다.
그의 역할은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저항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는, 페이팔 마피아의 세계관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기존의 관료 시스템, 외교 문법, 글로벌 합의 구조는 이들에게는 비효율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보였다.
트럼프의 거친 언어, 단순한 구호, 과감한 파기는 정책으로 보면 위험해 보일 수 있지만 시스템 전환의 관점에서는 ‘마찰 제거 장치’로 작동했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 이후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트럼프의 영구 집권이 아니라,
트럼프 이후에도 작동하는 구조다.
이 흐름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팔란티어다.
팔란티어를 단순히 ‘데이터 분석 기업’으로 이해하면 본질을 놓친다.
팔란티어가 하는 일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협으로 인식하며, 어디에 자원을 배치할지를 결정하는 프레임 자체를 제공한다. 범죄, 테러, 전쟁, 이민, 공급망, 금융 리스크. 이 모든 것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데이터 흐름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그 흐름 위에서 국가는 판단한다.
이것은 정책이 아니라, 운영체제다.
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법이 작동하는 순서와 속도는 소프트웨어가 결정한다.
이 지점에서 미국은 이미 과거와 다른 국가가 된다.
이 변화는 금융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스테이블코인은 새로운 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달러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다.
과거 달러 패권은 은행, 국채, SWIFT라는 제도를 통해 작동했다.
이제 달러는 코드로 움직인다.
누가 접근할 수 있는지, 언제 차단되는지, 어떻게 추적되는지가 법이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규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행 주체가 아니라, 통제 구조다.
민간이 발행하지만, 국가가 개입할 수 있고, 보이지 않게 연결되며, 자동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금융의 진화이자, 통치 방식의 진화다
.
미국은 헌법을 버리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헌법은 정당성의 근원이고, 상징이며, 마지막 안전장치다.
다만 그 위에, 훨씬 빠르고 정교한 운영 레이어가 얹힌다.
정치는 방향을 말하고 소프트웨어는 실행한다.
이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대통령이냐가 아니라 누가 시스템을 설계하느냐다.
페이팔 마피아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권력을 욕망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권력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시스템을 믿는다.
이 이야기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구조는 이미 글로벌 표준이 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은 여전히 “제도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논의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제도 위에 무엇을 얹을 것인가”를 실행하고 있다.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더 민주적인가, 누가 더 규제가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잘 설계된 국가 운영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다.
“트럼프는 목소리이고, 페이팔 마피아는 설계자이며, 팔란티어는 실행 엔진이다.”
그러나 총도, 거리도, 선언문도 없다.
조용히, 그러나 깊게 헌법 위에 소프트웨어를 얹고 있다.
그리고 그 소프트웨어는 투표하지 않는다.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실행한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예전 방식으로 볼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