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CEO들이 다시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이유
실리콘밸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알고리즘, 자본, 속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일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걷기(walking)입니다. 회의실보다 산책로에서, 화이트보드보다 길 위에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번아웃과 스트레스가 일상이 된 시대에 대한 하나의 집단적 해법에 가깝습니다.
AI 시대의 CEO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결정을 더 짧은 시간 안에 내려야 합니다. 기술은 가속되지만, 인간의 몸과 뇌는 그렇게 빠르게 진화하지 않습니다. 이 간극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판단력은 흐려지고, 감정은 소진되며, 번아웃은 구조적인 리스크가 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걷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걷기는 인간의 속도를 회복시켜 주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걷기는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자극해 창의적 사고를 활성화하고, 생각의 고착을 풀어줍니다. 책상 앞에서 막히던 문제가 길 위에서는 풀리는 이유입니다. CEO들에게 걷기는 운동 이전에 사고 전환 장치입니다.
실리콘밸리 기사들을 살펴보면, 걷기의 효과는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1. 창의성과 아이디어
걷는 동안 뇌는 일정한 리듬을 유지합니다. 이 리듬이 긴장을 완화하고, 방어적인 사고를 낮춥니다. 그 결과 회의실에서는 나오지 않던 솔직한 이야기와 새로운 관점이 등장합니다.
2. 집중도와 몰입
워킹 미팅에서는 휴대폰과 노트북을 덜 보게 됩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앞을 향하고, 대화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적당한 풍경 자극은 생각을 산만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깊이를 더해 줍니다.
3. 건강과 번아웃 방지
하루 종일 앉아서 코딩하고 회의하는 문화 속에서, 수천~수만 보를 걷는 루틴은 정신 건강과 체력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실리콘밸리 CEO들에게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 생존 관리에 가깝습니다.
이 문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축적되어 왔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채용과 전략 논의를 위해 긴 산책 미팅을 즐긴 것으로 여러 전기에서 반복해 언급됩니다. 중요한 대화일수록 의자를 벗어나 길 위로 나섰습니다. 걷는 동안 상대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역시 대표적인 걷기 예찬론자입니다. 인재 영입이나 인수 협상과 같은 민감한 대화에서 캠퍼스 주변 산책로를 함께 걷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긴장을 낮추고, 협상 상대를 ‘사람’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트위터의 잭 도시를 비롯한 여러 CEO들은 사무실에서 카페까지 걸어가며 회의하는 루틴을 만들었고, 이를 ‘새로운 형태의 파워 워크’라고 불렀습니다. 힘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힘을 덜어내는 방식의 리더십입니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걷기는 시간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판단의 질을 높이는 투자라는 인식입니다.
이 흐름은 일상 산책을 넘어 트레킹과 하이킹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와 베이 지역의 창업자, 지식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주말 등산이나 트레일 러닝을 “생산성과 창의성을 위한 리셋 버튼”으로 여기는 칼럼이 꾸준히 등장합니다.
한 실리콘밸리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이 싫다면 하이킹을 사랑하라.”
그는 매주 4시간씩 숲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걷는 것을 최고의 회복 전략으로 추천합니다. 숲에서는 성과도, KPI도, 이메일도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호흡과 발걸음, 그리고 생각의 잔향뿐입니다. 이 시간은 다시 일로 돌아가기 위한 정렬의 시간입니다.
CEO들은 누구보다 번아웃에 취약합니다.
미국 조사에 따르면 CEO의 절반 이상이 최근 1년 안에 불안, 우울,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CEO들은 이를 개인의 문제로 감추려 합니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아파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걷기는 숨길 수 없습니다.
걷다 보면 몸의 상태가 바로 드러납니다. 숨이 차면 멈춰야 하고, 무리가 오면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그래서 걷기는 CEO들에게 불편하지만 정직한 행위입니다. 동시에 추가 사고를 막는 가장 현실적인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걷기가 확산된 배경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참는 리더십보다, 스스로를 관리하는 리더십이 더 오래 간다는 깨달음입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토아 철학은 “자연과 이성에 따라 사는 삶을 통해 내적 평온을 얻는 법”을 가르치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실천 철학입니다. 세상은 통제 불가능한 사건으로 가득하지만, 오직 자신의 판단과 행동만 통제할 수 있다고 보고 여기에만 에너지를 쓰라고 강조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부·명예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지혜·용기·절제·정의의 덕을 실천하는 데서 온다고 보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이상으로 삼습니다
스토아 철학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와 걷기 문화의 확산은 맞닿아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외부 환경은 통제할 수 없지만, 오늘 내가 얼마나 걷는지, 언제 멈추는지, 어디까지 무리할지 말지는 통제할 수 있습니다.
걷기는 그 통제를 몸으로 연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는 걷기를 예찬합니다.
더 빨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AI는 앞으로도 더 똑똑해질 것입니다.
업무는 더 복잡해지고, 선택은 더 무거워질 것입니다.
이 흐름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속도를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의 CEO들은 다시 걷습니다.
회의실을 벗어나고, 산책로로 나가고, 때로는 산으로 향합니다.
이는 유행이 아니라 생존 전략입니다.
걷는 사람은 덜 흔들립니다.
걷는 CEO는 조금 느리지만, 더 오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