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와인 추천해 달라’는 말과 함께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해야 와인을 좋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와인 추천도 어렵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건 정말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책을 전수하라거나 세계 평화를 이룩할 묘책을 알려달라는 질문과 유사한 기분이랄까. 차라리 와인이나 한잔 하자면 흔쾌히 응하겠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니…
이런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문제이므로 ‘좋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은 성립되기 어려운 문장이다. 어쩌면 ‘와인을 좋아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것은 와인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테고, 관심이 있다는 것은 와인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어쨌든 와인과 친해지고 싶으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와인을 접해 보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 한눈에 와인과 사랑에 빠지지 못한 것일까?
서울 올림픽 전후로 와인이 한국에 본격 수입되기 시작하고, 2천 년대 초 <신의 물방울>이 메가 히트를 기록한 이래 와인은 그야말로 핫 아이템이 되었다. 최근에는 와인을 일상적으로 즐기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 같지만, 여전히 와인이 어렵고 낯설다는 사람이 제법 많다. 몇 번 마셔 보고는 와인과 멀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와인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비교적 높은 가격이나 낮은 접근성 등도 문제이지만 우선 와인이 가진 일반적인 성격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과실주인 와인은 우리에게 친숙한 곡물 양조주나 증류주, 희석식 소주 등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특히 떫은맛을 주는 타닌(tannin)과 강한 신맛은 처음 와인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에스테르(ester), 알데히드(aldehyde) 등 다양한 향미 성분의 조합에 따라 수천, 수만 가지의 다양한 아로마와 풍미가 나타나기 때문에 와인 스타일 별로 확연히 다른 개성을 가진다. 외래어로 된 긴 이름은 또 어떤가. 게다가 품종에 지역까지 기억해야 하고 빈티지에 따라서도 같은 와인도 달라진다니 와인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와인은 그렇게 이별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음료이다. 필자 또한 처음 와인을 접했을 때 그 떫고 신 맛에 몸서리를 치면서 반 병도 못 마시고 수채 구멍에 콸콸 쏟아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 버렸던 와인과 같은, 빈티지만 다른 와인을 지금은 너무나 맛있게 잘 마시고 있다면 믿기 어렵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 와인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어떤 와인이었는지는 공개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잠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오래전 큰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홍어 마니아가 된 해리’의 에피소드가 나온 적이 있다. 암모니아 냄새가 풀풀 풍겨 성인들도 기피하는 경우가 많은 홍어는 ‘빵꾸똥꾸’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까칠한 초등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중 해리가 홍어를 좋아하게 된 까닭은 바로 ‘반복적인 노출’에 있었다. 해리의 식탐을 고치려고 음식에 계속해서 홍어를 넣었던 오빠 덕(?)에 해리는 외려 홍어 마니아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웃자고 만든 시트콤 에피소드지만 일말의 시사점이 존재한다. 음식의 기호는 개인차가 크다고 해도 반복적인 노출로 익숙해지고 참맛을 깨닫게 되면 그 음식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엔 김치를 입에도 안 대던 아이가 성장해서는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게 된다거나, 징그럽기만 하던 선짓국이 어느덧 담백하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 등등. 사실 이렇게 적응이 필요한 음식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술 아니던가. 처음 술을 마셨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 부모님 출타 시 몰래 마셨던 장식장의 양주 한 모금, 친구들과 모여 앉아 새우깡 안주와 들이켰던 백일주, 신입생 환영회에서 냉면 사발에 찰랑이던 소주 등 상황이야 어쨌건 첫 경험에서 술이 맛있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억지로 삼키고 혀 안쪽에서 느껴지는 쓴 맛을 참으며 음주 경험을 쌓아가다 보니 비로소 진정한 술맛을 아는 경지에 이른 것 아니던가. 젖먹이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모든 일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와인도 이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무엇보다 와인과 자주 만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소주나 맥주의 경우는 일상에서 접하기 쉬우므로 자연스럽게 친숙해졌음을 기억해 보자. 와인은 일반 주류에 비해 자주 만나기가 어려우므로 의식적으로 곁을 내줄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조금 막연할 수도 있지만 용기를 내어 부딪혀 보면 길이 열릴 것이다. 주변에 와인 전문가나 마니아가 있다면 추천을 부탁해 보자. 아마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응할 것이다. 대형 마트의 와인코너나 와인샵의 직원들도 안면을 트고 나면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와인 개론서나 인터넷 카페/사이트 등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백견이 불여일행(百見 不如一行)이라고 정보만 얻고 마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경험이 없으면 와인 맛에 대한 기준 또한 없는 셈이니 새로운 와인을 다양하게 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마신 와인을 기억하는 것이다. 맛있게 마신 와인, 특별한 개성이 느껴진 와인을 기억해 두어야 나만의 와인 세계가 확장된다. 하지만 생소한 외래어 레이블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게다가 와인을 마셔 어지러운 머리는 기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핸드폰으로 와인 레이블 사진을 찍어 놓는 것이다. 일단 괜찮다 싶으면 사진을 찍어 놓고 나중에 검색을 통해 정보를 확인하면 된다. 그러면 해당 와인을 기준으로 같은 생산자의 다른 와인, 혹은 비슷한 지역이나 품종 등으로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최소한 와인샵에 가서 사진을 들이대며 ‘이 와인 뭐예요? 비슷한 거 있나요?’라고 물어볼 수 있으니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와인을 자주 접하고, 마신 와인을 기억하게 되면 이제 와인을 스스로 탐색해 나갈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포인트는 가능하면 마신 와인을 기록하라는 것이다. 꼭 전문가처럼 향이 어쩌고 맛이 어쩌고 하는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느낌이나 감상도 좋고, 객관적인 정보나 기술적인 요소에 대한 설명도 괜찮다.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신이 남기고 싶은 내용을 적으면 된다. 그러면 그 와인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타인과 경험을 나누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결국 함께 즐기는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며 작성한 기록은 미래의 자신, 혹은 주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만의 와인 세계 또한 그만큼 넓고 다양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와인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에 품었다가 고백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가는 짝사랑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기억하고, 기록해 보자. 어느 순간 와인이 내 일상으로, 마음속으로 들어와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