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와인 하면 자연스럽게 네로 다볼라(Nero d'Avola) 품종이 떠오른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적포도 품종이며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다. 품질 또한 빼어나다. 짙은 컬러에 부드럽고 진한 과실 풍미, 후추와 감초, 시나몬 등의 향신료 힌트, 스모키 뉘앙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타닌도 많고 산미도 적절해 장기 숙성용 와인을 만들 수도 있다. 에브리데이 와인부터 프리미엄 와인까지 다양한 와인을 만들 수 있는 다재다능한 품종이다.
하지만 시칠리아에 네로 다볼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총면적 25,711 km²로 제주도의 14배나 된다. 포도밭 면적만 해도 9만 8천 헥타르로 제주도 면적의 절반을 넘어선다. 당연히 다양한 품종으로 지역마다 개성적인 와인을 만든다. 카타라토(Catarratto), 그릴로(Grillo), 인졸리아(Inzolia), 지비보(Zibibbo) 같은 토착 청포도 품종도 널리 재배하며, 마르살라(Marsala) 같은 주정강화 와인이나 말린 포도로 만든 스위트 와인도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시칠리아의 레드 와인에 집중해 보자.
시칠리아에는 1개의 DOCG와 23개의 DOC가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와인은 시칠리아 섬 전체를 커버하는 광역 DOC인 '시칠리아(Sicilia DOC)'로 출시된다. 시칠리아 DOC에 네로 다볼라,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 품종 이름을 병기해 출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시칠리아 와인을 고를 땐 세부 지역 DOC보다는 품종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 최대의 활화산인 에트나 산기슭에서 나오는 에트나 로쏘(Etna Rosso)다. 포도밭은 보통 해발 500-600m의 고지대에 있으며, 1,200m를 넘어서는 곳도 있다. 척박한 화산 토양에 일조량이 많으며, 일교차가 극단적으로 크기 때문에 풍미의 밀도가 높고 예리한 산도와 미네랄리티를 지닌 와인을 만들 수 있다. 부르고뉴(Bourgogne) 레드 와인의 우아함과 바롤로(Barolo)의 강건함을 겸비한 와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주요 품종은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이며 네렐로 카푸치오(Nerello Cappuccio) 등을 일부 블렌딩하는 경우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체라수올로 디 비토리아(Cerasuolo di Vittoria)다. 시칠리아 유일의 DOCG로 시칠리아 남부 비토리아 지역에서 생산한다. 체라수올로는 '체리 컬러'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영롱한 체리 컬러가 아름다운 와인이다. 풍미 또한 체리를 비롯해 앵두, 석류 등 작고 붉은 베리 향기와 미네랄리티가 명확히 드러나며, 숙성하면 가죽과 향신료 뉘앙스가 매력적으로 곁들여진다. 모래질 토양에서 재배한 네로 다볼라와 프라파토(Frappato) 품종을 함께 사용한다. 프라파토는 단독으로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낸다. 대단히 오래된 토착 품종이지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프라파토는 가볍고 신선하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지닌 미디엄 바디 와인으로, 출시 즉시 마셔도 좋고 중장기 숙성 후에 즐겨도 훌륭하다.
시칠리아는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지역이라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Merlot), 시라(Syrah) 등 국제 품종 또한 잘 자란다. 국제 품종 단독으로 와인을 만들거나 국제 품종끼리, 혹은 네로 다볼라 등 토착 품종과 블렌딩해 사용한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섬인 데다 위도상 남쪽에 있어 더운 지역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대부분의 포도밭은 언덕이나 산악 지역에 있기 때문에 일교차가 크다. 때문에 충분한 일조량과 서늘한 밤의 영향으로 생리적으로 완숙하면서도 산도가 높은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나머지 포도밭들도 대부분 바다의 영향을 받는 해안가 부근에 있어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내륙 지역은 강수량이 극히 적으며, 해안가라고 해도 연 400-500m 정도로 강수량이 많지 않다. 게다가 건조한 기후 덕분에 병충해의 위험이 낮다. 때문에 유기농 재배 비율이 전체 포도밭 면적의 34%에 이른다. 이탈리아 와인 산지 중 가장 넓은 규모다. 유기농, 지속가능 농법(sustainable viticulture) 등 친환경 농법을 적용하는 포도밭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양질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으니 와인의 맛과 품질이 나쁠 수가 없다. 추운 겨울, 시칠리아 레드 와인의 매력에 빠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