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amette Valley
미국 오리건(Oregon)은 세계적인 피노 누아(Pinot Noir) 산지다. 이제 '부르고뉴밖에 모르던 피노 누아가 미국에서 새로운 집을 찾았다'는 표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특히 윌라메트 밸리(Willamette Valley)는 오리건의 머리요, 심장이자 손발이다. 레드 와인이 주를 이루는데, 재배하는 적포도 품종의 90%는 피노 누아다. 부르고뉴의 대표적인 화이트 품종 샤르도네(Chardonnay) 또한 잘 자란다. 드루앵(Drouhin), 루이 자도(Maison Louis Jadot) 등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메종들도 그 진가를 인정하고 윌라메트 밸리에 자리 잡았다. 도미니크 라퐁(Dominique Lafon)이나 장 니콜라 메오(Jean-Nicolas Méo) 같은 부르고뉴의 거장들 또한 윌라메트 밸리의 생산자들과 함께 윌라메트 밸리에서 와인을 만들고 있다. 또한 피노 그리(Pinot Gris), 리슬링(Riesling), 시라(Syrah)처럼 서늘한 곳에서 잘 자라는 품종들도 서서히 그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윌라메트 밸리의 명성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윌라메트 밸리는 오리건의 하위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인증된 와인 생산 지역이다. 오리건 자체도 하나의 AVA이지만 그 아래 다시 AVA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네스티드 AVA(nested AVA)라고 한다. 윌라메트 밸리 안에는 다시 11개의 하위 네스티드 AVA가 있다. 모두 2000년대 설립된 것들이다. 이는 윌라메트 밸리가 부르고뉴처럼 세부 지역의 특징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윌라메트 밸리는 오리건 북부에서 남쪽으로 240km가량 길게 뻗어 있다. 때문에 네스티드 AVA 마다 다채로운 토양과 지형, 그리고 그로 인한 미세 기후를 보인다. 윌라메트 밸리의 주요 토양은 크게 세 가지다. 먼 옛날 바다였던 지역이 융기하면서 드러난 해양 퇴적토, 대륙판의 충돌에 의한 화산 활동으로 생긴 화산토, 강한 바람에 날려와 쌓인 황토(loess) 등이다. 해양 퇴적토는 pH가 낮고 토양 내 질소가 적어 뿌리가 물과 미네랄을 찾아 깊이 자란다. 현무암을 기반으로 풍화된 화산토는 점토 함량과 철분이 높아 뚜렷한 붉은색을 띤다. 해양 퇴적 토양보다 물을 더 잘 유지하기 때문에 덥고 건조한 여름에도 포도나무가 잘 자라도록 돕는다. 반대로 풍화 황토는 입자 크기가 커 배수가 잘 되기 때문에 포도나무가 물을 찾아 뿌리를 깊게 뻗는다. 이는 풍미의 밀도가 높고 복합적인 포도를 생산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토양들이 세부 AVA별로 다양하게 뒤섞이고 다양한 지형과 맞물려 개성적인 와인들이 나오는 것이다. 11개의 네스티드 AVA들을 가볍게 살펴보자.
체할렘 마운틴(Chehalem Mountains AVA)
2006년 설립된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큰 AVA 중 하나다.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밭을 포함한다. 해발 500m에 이르는 정상부는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손꼽히며, 해발 60m에서 300m에 이르는 언덕과 경사지는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다. 넓은 만큼 토양 특성 또한 다양하다. 리본 릿지 AVA와 로럴우드 AVA를 포함한다.
리본 릿지(Ribbon Ridge AVA)
2005년 설립된 리본 릿지는 체할렘 마운틴의 서쪽 끝 부분이 붙어 있다. 리본 릿지의 토양은 미세 사암과 진흙이 굳은 암석 등이 섞여 있다. 일반적으로 수분을 잘 유지하지만 양분이 풍부하지는 않다. 때문에 알이 작고 풍미가 응집된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로럴우드 디스트릭트(Laurelwood District AVA)
2020년 설립된 로럴우드 디스트릭트는 체할렘 마운틴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주로 빙하 시대 형성된 황토와 바람에 날려 온 모래, 점토, 미사(silt) 등의 퇴적물이 현무암 위에 쌓여 있다. 오래된 포도밭의 경우 포도가 천천히 완숙돼 양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투알란틴 힐스(Tualatin Hills AVA)
투알란틴 힐스는 2020년 설립됐지만 1880년대 포도밭이 조성되었고, 오리건 최초의 상업적 포도밭이 존재하는 등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역사가 깊은 지역이다. 윌라메트 밸리 북서쪽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요 토양은 현무암이 섞인 황토다. 필록세라가 살기 어려운 토양이기 때문에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자가 뿌리 포도나무를 보유하고 있다.
던디 힐스(Dundee Hills AVA)
2004년 설립된 던디 힐스는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네스티드 AVA일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원형극장 형태이며, 늦여름 동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내륙 바람을 받아 윌라메트 밸리의 AVA 중 가장 따뜻하다. 토양은 홍수 퇴적물 위에 쌓인 풍화된 붉은 황토다. 배수가 뛰어나면서 수분 유지력도 좋아 덥고 건조한 여름에도 물 부족으로 인한 포도나무 스트레스가 적다.
얌힐 칼튼(Yamhill-Carlton AVA)
2004년 설립된 얌힐 칼튼은 칼튼(Carlton)과 얌힐(Yamhill) 마을을 중심으로 아래가 뚫린 말발굽 모양의 구릉지다. 토양은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해양 퇴적토다. 매우 척박하고 배수가 잘 되기 때문에 포도나무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싹과 잎의 성장을 멈추고 포도의 성숙에 집중한다. 덕분에 서늘한 빈티지에도 상대적으로 완숙한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맥민빌(McMinnville AVA)
2005년 설립된 맥민빌은 얌힐 칼튼 바로 남쪽에 인접해 있다. 해발 60m에서 300m 사이에 위치한 동향 및 남향 포도밭은 시원하고 건조한 바람을 받아 병충해가 적고 신선한 풍미를 유지한다. 토양은 해양 퇴적 토양과 현무암의 조합으로 오리건의 어떤 AVA와 비교해도 오래되고 복잡한 편이다. 여러 모로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는 데 유리한 환경이다.
이올라 에미티 힐즈(Eola-Amity Hills AVA)
2006년 설립된 이올라 에미티 힐스는 윌라메트 강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은 언덕이다. 동쪽과 서쪽 경사면의 포도밭들은 지형과 일조량에 따라 와인 스타일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서쪽의 반 두저 코리도어(Van Duzer Corridor)를 통해 유입되는 차가운 바닷바람은 늦여름 오후의 기온을 크게 떨어뜨려 포도의 신맛을 유지하고 풍부한 타닌과 풍미를 갖추는 데 도움을 준다. 토양은 현무암, 해양퇴적암, 퇴적토 등이 섞여 있고 바위가 많다. 배수가 좋기 때문에 풍미의 집중도가 좋은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반 두저 코리도어(Van Duzer Corridor AVA)
2019년 설립된 반 두저 코리도어는 코스탈 레인지(Costal Range)의 틈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특징이다. 다른 윌라메트 밸리의 AVA들보다 바람이 4~50%는 강하다. 덕분에 과육 대비 포도 껍질 비율이 높아 타닌과 풍미, 신맛, 컬러가 더욱 풍부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 토양은 해양 퇴적토 중심이다.
마운트 피스가, 포크 카운티, 오리건(Mount Pisgah Polk County, Oregon AVA)
2022년 설립된 '마운트 피스가, 포크 카운티, 오리건'의 중심에 있는 산은 6500만 년 전 해저 화산 활동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해양 퇴적물로 덮인 후 해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 독특한 토양과 지중해성 기후가 맞물려 생산량이 많으면서도 질 좋은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로워 롱 톰(Lower Long Tom AVA)
2021년 설립된 로워 롱 톰은 윌라메트 밸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네스티드 AVA다. 포도밭은 하천으로 나뉜 능선에 있는 점토, 양토, 사암질 토양에 위치한다. 여름 강수량이 적은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며, 바다와 주변 숲의 영향으로 형성된 서늘한 미세 기후 덕분에 높은 산미를 지닌 완숙한 포도를 얻을 수 있다.
아쉽게도 일부 윌라메트 밸리 네스티드 AVA의 와인은 아직까지 한국에서 흔히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윌라메트 밸리 와인들이 많이 있다. 아래 추천하는 와인들은 물론 다양한 윌라메트 밸리 와인들을 마셔 보길 권한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