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산지: 워싱턴

Washington

by 개인 척한 고냥이

'워싱턴에서 와인을 만든다고? 미국의 수도에서?'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워싱턴은 워싱턴 D.C.가 아니라 50개 주 중 하나인 워싱턴주(Washington State)를 의미한다. 미국 북서부 끝에 위치해 북쪽으로 캐나다, 서쪽으로 태평양과 인접한다. 바로 남쪽에는 피노 누아(Pinot Noir)로 유명한 오리건(Oregon) 주, 더 남쪽에는 미국 최대의 와인 산지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가 있다.


워싱턴은 캘리포니아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프리미엄 와인 산지다. 포도밭 면적은 24,000헥타르가 넘으며, 1,000개 이상의 와이너리와 400여 포도 재배자가 존재한다. 재배하는 품종은 80여 종에 이른다. 그만큼 다양한 와인을 만든다는 의미다. 북쪽에 자리 잡고 있기에 화이트 와인이나 비교적 가벼운 레드 와인을 생산할 것 같지만 레드 와인 생산 비율이 6:4 정도로 더 높다. 그것도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시라(Syrah) 등 구조감 있는 와인을 만드는 품종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품질 좋은 화이트 와인도 생산한다. 특히 리슬링(Riesling)은 초기 워싱턴 와인의 위상을 높인 일등공신이다. 생산량이 가장 많은 화이트 품종인 샤르도네(Chardonnay)는 지역과 생산자별로 다양한 스타일이 나온다. 이외에 피노 그리(Pinot Gris)와 소비뇽 블랑(Sauvignon) 또한 최근 각광받는 품종들이다. 워싱턴이 이렇게 다양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다양한 테루아 덕분이다.


20240310185103006863.jpg [ 워싱턴의 와인 생산지 지도 ]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워싱턴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올림픽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이다. 천만여 년 전에 대륙판의 충돌로 이 산맥들이 융기하면서 흘러나온 용암들은 동쪽에 두터운 현무암 대지를 형성했다. 용암이 흐르며 형성한 해발 200-600m의 고원은 포도 재배에 알맞은 지형이다. 다음은 미줄라 대홍수(The Missoula Floods)다. 약 1만 5천 년 전에 발생한 이 엄청난 홍수는 2,000년에 걸쳐 수십 차례나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다양한 지형과 토양을 형성했다. 이 홍수는 아름다운 협곡과 단층을 만든 동시에 포도 재배에 알맞은 토양을 사방에 날라 주었다. 마지막은 바람이다. 퇴적토가 오랜 시간 풍화되며 바람에 날려 쌓인 황토가 워싱턴의 대표 와인 산지 콜롬비아 밸리(Columbia Valley)의 표토를 비옥하게 덮어 주었다. 가볍고 고운 입자인 황토는 배수가 좋으면서도 일정 수준의 수분을 유지하는 양면성이 있다. 미네랄도 풍부해 포도 재배에 매우 적합하다.


워싱턴의 와인 산지는 북위 46도 위아래로 걸쳐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와 북부 론(Northern Rhone)과 유사하다.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위도라는 이야기다. 일단 일조량이 충분하다. 콜롬비아 밸리의 포도 재배 기간 평균 일조량은 약 14-16시간으로 나파 밸리(Napa Valley)보다 1시간이나 많다. 게다가 포도 성숙기의 일교차는 17~19°C 정도로 매우 크다. 때문에 포도는 생리적으로 완전히 익으면서도 신선한 신맛을 유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수량이다. 콜롬비아 밸리의 연평균 강수량은 150-200mm에 불과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300일이 넘는다. 이는 올림픽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의 비 그늘 효과(Rain Shadow Effect) 덕분이다. 태평양의 습한 바람이 산맥을 넘으며 비를 뿌린 후 건조한 상태로 동쪽에 불어오기 때문이다. 물이 너무 부족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콜롬비아 강이 충분한 물을 공급하는 데다, 포도 재배에도 긍정적인 미세 기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20240310185140710522.jpg [ 워싱턴 레드 마운틴 AVA의 포도밭 전경 ]

워싱턴의 생산자들은 2015년 와인과학센터(Wine Science Center)라는 첨단 연구 시설을 설립해 지역별 테루아 및 그에 맞는 품종, 클론, 재배법과 양조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또한 지역별 개성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콜롬비아 밸리 내의 하위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들을 세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지만 앞으로 더욱 다양한 개성의 워싱턴 와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콜롬비아 밸리를 비롯해 호스 헤븐 힐(Horse Heaven Hills), 레드 마운틴(Red Moutain), 왈라 왈라 밸리(Walla Walla Valley), 야키마 밸리(Yakima Valley) 등 주요 AVA들만 기억해 두자.


흔히 워싱턴 와인을 표현할 때 '신세계 와인의 잘 익은 과일 풍미와 구세계 와인의 우아한 밸런스를 겸비했다'라고 한다. 여기에 '최고의 가성비'라는 엄청난 장점이 더해진다. 와인을 즐기면서도 아직 워싱턴 와인을 접해 보지 못했거나 별 관심이 없다면 크게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워싱턴 와인 대부분은 곁에 두고 즐길 가치가 충분한 와인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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