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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와인 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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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Nov 10. 2018

떼루아(Terroir) 체험

2011년 시월의 어느 저녁, 늦게까지 친구와 소주와 맥주를 얼큰하게 들이켜고 귀가한 나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로 꼬꾸라졌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에 취하거나 피곤했던 것도 아닌데 왠지 침대에 푹 파묻히고 싶었달까. 그런데 그런 내가 못마땅했던 아내는 빨리 외투부터 벗고 씻고 자라며 성화를 부렸다. 평소라면 다소간의 음주 후에도 스스로 단정히 옷부터 걸고 세면을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던 터라, 이 한 번 어리광을 못 받아주나 하는 생각에 빈정이 상했던 필자는 옷 벗는 시늉만 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그만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침대 아래는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아 차가운 마루 바닥. 서늘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데다 빼꼼히 열린 창문에서 찬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하지만 삐친 척을 해야 했던 필자는 바로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한동안을 바닥에서 헐벗은 채로 버텼다. 시간이 흘러 이러다가는 입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바로 이것이 떼루아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아니 이 무슨 소리냐고, 아직 술이 덜 깼냐고 의아해할 사람이 많으리라. 사실 술김에 마루 바닥에 누워 있다가 떼루아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모주망태의 주정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왕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다. 


처음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웠을 때는 차가운 바람도 느낄 수 없었고, 침대에 깔린 푹신한 이불이 체온을 유지해줘 따뜻한 기운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아래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직격으로 노출되었고, 딱딱한 나무 바닥은 체온 이탈을 막지 못한 채 찬 기운만을 발산하고 있었다. 불과 몇십 센티미터 차이인 침대 위와 아래의 상황은 그렇게 천국과 지옥처럼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아니던가? 바로 ‘일급 밭’과 ‘그랑 크뤼’들이 모자이크처럼 얽혀 있는 부르고뉴의 황금 언덕(Cotes d’Or)에서 떼루아를 설명할 때 나오는 말과 유사하지 않은가. 불과 한 걸음 떨어진 밭 사이에도 큰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 말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그 설명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수도사들의 오랜 연구와 농부들의 경험을 통해 밝혀진 떼루아의 신비라는 것이 존재는 할 것이라고 막연히 믿으면서도, ‘몇 뼘이 만들어 내는 차이’까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제의 경험으로 충분히 그런 차이가 가능하리라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들었다. 


우선 내가 누웠던 바닥에 해당하는 표토의 성분에 따라 태양의 열기를 머금고 다시 내뿜는 정도가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지표의 형태, 고도, 경사는 물론 표토 아래 토질의 복잡한 구성까지 고려하면 땅의 영향은 훨씬 더 클 것이다. 또한 창문에서 불어오던 바람은 포도 산지가 주로 형성되는 지형인 계곡에 부는 바람에 비견할 수 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저 바람 또한 포도나무들이 민감하게 느낄 요소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내 경험(?)에서는 알 수 없었던 일조량, 강수량, 호수나 강의 유무 등 다양한 환경들까지 고려하면 ‘한 뼘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떼루아의 신비를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예컨대 독일의 모젤(Mosel)과 같이 굽이치는 계곡의 깎아지른 절벽이라면 한 뼘이 아니라 손가락 한 마디 거리에도 커다란 떼루아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르고뉴의 끌리마(climat)들을 가르는 돌담을 지나치면서도, 토스카나(Toscana)의 포도나무들을 쓰다듬으면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떼루아의 이치를 이렇게 침대 아래서 체험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소주 마시고 주정 부리는 와중에 떼루아에 대한 영감이 들었다는 게 더 대단한 신비이긴 하지만. 


오오 와인이여, 신앙의 신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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