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강화 와인(酒精强化 Wine). 말 그대로 와인에 주정, 즉 브랜디 원액(Eau de Vie)등 높은 도수의 알코올을 더하여 강화한 와인을 의미한다. 혹자는 ‘주정(酒酊)을 강화하는 와인’이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주정강화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15-20% 수준으로 희석식 소주를 넘어서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밀한 풍미와 부드러운 질감 덕에 술술 잘 넘어가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취하기 십상이다. 이렇듯 주정강화 와인은 향기가 짙고 단 맛을 지닌 경우가 많아 알코올 도수가 높아도 부담스럽지 않다. 용어의 직관적 의미는 ‘순도 높은 알코올로 강화된 와인’이지만 실상은 ‘모든 요소들의 표현을 극대화한 와인’이 바로 주정강화 와인인 셈이다.
주정강화 와인의 대표적인 예로 포르투갈의 포트(Port)와 마데이라(Madeira), 그리고 스페인의 쉐리(Sherry)가 꼽힌다. 이들이 번성한 시기는 대략 15세기 이후. 포트와 쉐리는 100년 전쟁으로 프랑스와 사이가 틀어진 영국이 보르도(Bordeaux) 와인 수입을 중단한 것을 계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보르도 와인의 대안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와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보르도에서 와인을 수입할 때 보다 훨씬 길어진 수송기간 동안 와인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한 것이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마데이라가 유명해진 이유도 대항해시대 대서양으로 기나긴 항해를 떠나던 선박들의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부터다. 장기간의 항해 중 마실 귀중한 와인이 더운 날씨와 진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코올을 첨가했고 독특한 환경의 영향으로 개성적인 풍미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듯 주정강화 와인은 주로 더운 환경에서 와인의 변질을 막음과 동시에 독특한 풍미를 더하기 위해 탄생했다.
뱅 두 나튀렐(Vins Doux Naturels, 이후 VDN으로 표기)은 포트, 마데이라, 쉐리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정강화 와인으로 손꼽힌다.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많이 생산하는데 그 중심은 단연코 루시옹(Roussillon)이다. 2012년 기준 루시옹의 VDN 생산량은 16.6만 헥토리터(hl)로 프랑스 전체 생산량의 80%에 이른다. 이외에 랑그독(Languedoc), 남부 론(Southern Rhone), 코르시카(Corsica) 섬 등에서 주로 뮈스카(Muscat) 품종으로 VDN을 생산한다. 이 글에서는 2014년 방문했던 주요 산지인 루시옹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뮈타주의 마법
먼저 VDN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순도 높은 알코올 첨가를 통한 발효의 중단, 즉 뮈타주(Mutage)다. 일반적인 발효 과정 중에 전체 포도즙 5~10% 분량의 순도 96°포도 알코올(브랜디)을 첨가하면 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효모의 발효 작용이 멈춘다. 이렇게 발효되지 않은 포도의 천연 당분이 단맛을 내기 때문에 뱅 두 나튀렐(Vins Doux Naturels), 영어로 ‘natural sweet wine’이 되는 것이다. 뮈타주 방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몽펠리에 대학 학장이자 마요르크(Majorque) 왕실의 의사였던 아르노 드 빌라노바(Arnau de Vilanova). 그가 1285년 루시옹의 주도 페르피냥(Perpignan)에서 뮈타주 방식을 발견하면서 높은 알코올의 와인을 얻기 위해 포도를 건조하거나 나무에 매달린 채로 과숙시키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VDN 탄생의 길이 열렸다.
AOC/AOP 그리고 스타일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VDN의 생산 지역과 스타일은 매우 다양하다. 포도주에 알코올을 더했다고 해서 유사한 스타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떼루아, 포도 품종, 양조 및 숙성 방법, 산화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한 컬러와 풍미를 지닌 VDN이 나온다. 산화 숙성하지 않은 대표적인 VDN은 뮈스카 드 리브잘트(Muscat de Rivesaltes). 바뉼스와 모리, 리브잘트를 포함한 가장 폭넓은 지역에서 생산된다. 세련된 흰 꽃 향기와 잘 익은 노란 과일, 살구 등의 풍미는 VDN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사랑받을 만하다. 뮈스카 드 리브잘트의 이런 특징들을 더욱 잘 살리기 위해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와 같은 '누보 버전’도 존재한다. 뮈스카 드 노엘(Muscat de Noël), 즉 성탄절의 뮈스카로 불리는 VDN으로 수확한 해의 11월 셋째 주 목요일부터 판매된다. 숙성 기간이 짧아 싱싱한 과일 특성이 더욱 잘 부각되며 실제 크리스마스에 쿠키나 케익 등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VDN를 처음 접한다면 뮈스카 드 리브잘트를 먼저 마셔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리브잘트(Rivesaltes)는 루시옹 전역에서 생산되는 VDN으로 면적과 스타일, 생산량 등 모든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산화 숙성하지 않은 그르나(Grenat), 블랑(Blanc), 로제(Rose) 등은 향긋한 꽃 향기가 매력적으로 드러나며 잘 익은 과일의 신선함이 살아있는 스타일. 산화 숙성한 튈레(Tuilés), 앙브레(Ambrés)는 공통적으로 절이거나 말린 과일, 견과, 로스팅 등의 풍미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으며, 사용된 품종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완성된 와인의 색상에 따라 구분한다. 튈레나 앙브레를 5년 이상 숙성하면 오르 다주(Hors d’Age)라는 명칭을 쓸 수 있으며, 오랜 숙성이나 급격한 산화로 로스팅한 견과의 풍미가 드러나면 랑시오(Rancio)라고 한다. 모리 두(Maury Doux)는 리브잘트와 유사한 규정을 적용하지만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 품종의 재배 비율이 높으며 화이트 와인도 생산한다. 아래 별도로 소개할 바뉼스(Banyls) 또한 고품질 VDN을 생산하는 VDN의 핵심 지역이다.
해안가 절벽이 만들어 낸 개성적인 떼루아, 바뉼스
작년 11월 말 루시옹을 방문했을 때 특히 강렬한 인상을 받은 VDN이 바로 바뉼스다. 바뉼스가 생산되는 지역은 남으로는 스페인과 접경을 이루고 동쪽은 지중해와 면한 4개 마을. 이 지역에 처음 들어서면 우선 해안가의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한 포도밭의 장관에 압도된다. 굵직한 자갈들을 엮어 만든 테라스에 조성된 포도밭을 따라 걷다 보면 잔잔해 보이는 바다로부터 은근히 매서운 바람이 산자락을 타고 지속적으로 불어온다. 이 해풍이 한여름에는 뜨거운 햇살과 지면의 열기를 달래주며 병충해 또한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포도밭을 구성하는 토양은 대부분 회색과 갈색 편암(Schist). 비바람에 의한 침식으로 형성된 얕은 모래 점토층 위를 편암 자갈들이 빽빽하게 덮고 있다. 이 경사지고 척박한 토양에서 살아남기 위해 포도나무는 편암층을 깨고 뿌리를 뻗어 물과 양분을 찾아야 한다. 이런 독특한 토양과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바뉼스는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AOC/AOP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바뉼스의 독특한 떼루아는 VDN의 다양한 숙성 방법으로 인해 그 개성을 더욱 강하게 발현한다. 숙성하지 않고 마시는 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VDN은 나무통이나 유리병에서 30 개월 이상 장기간 숙성하는데 그 방법이 다양하다. 푸드르(foudre, 5천 리터 이상 크기의 커다란 나무통), 드미-뮈(demi-muid, 150~300 리터 크기의 나무통), 배럴(barrel) 등 다른 크기의 나무통에 담아 실내에서 보관하거나, 드미존(demijohn)과 같은 유리병이나 나무통에 담아 옥외에서 숙성하기도 한다. 특히 옥외에 보관한 VDN은 햇볕과 온도 변화에 고스란히 노출됨으로써 숙성이 촉진되어 특유의 풍미를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야외에서 숙성한 와인은 그대로 병입하거나 나무통에 보관한 와인과 블렌딩하여 길게는 몇십 년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숙성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VDN 특유의 숙성 과정을 바뉼스의 대표적인 두 생산자, 바뉼스 레투알(Banyuls l'Etoile)과 아베 루(Abbé Rous)의 카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뉼스 레투알의 옥상에서는 드미존에 담긴 바뉼스들이 태양 아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카브 안에는 푸드르와 배럴 안에 담겨 있거나 이미 병입된 와인들이 숙성되고 있었다. 바뉼스 레투알은 1945년 이후의 모든 빈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마다 특정 빈티지의 병입 및 출시를 결정한다.
아베 루의 카브에서는 외부에 길게 쌓여 있는 650리터 들이 배럴들과 카브 내부의 거대한 푸드르들이 인상적이었다. 카브와 포도밭 사이에 2단으로 길게 늘어선 배럴들은 하단부의 배럴에서 숙성된 와인을 뽑아낸 후 상단에 새로운 와인을 채움으로써 균일한 품질을 꾸준히 유지하는 솔레라(solera)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었다. 일부 특별한 바뉼스들이 이 외부의 오크통에서 1년 동안의 산화 숙성을 거쳐 출시된다. 카브 내부의 엄청난 규모의 푸드르들은 그 대단한 크기만큼이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것들로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고 한다.
숙성 용기의 재료와 크기, 숙성 환경 등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개별 와인들의 개성 또한 다르게 발현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VDN을 단순히 알코올을 강화한 와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아쉽게도 현재 국내에서 바뉼스를 비롯한 VDN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조만간 개성적인 VDN들이 국내 시장에 많이 소개되기를 바란다.
주정강화 와인(5종)
리브잘트(Rivesaltes): 루시옹의 86개 마을과 함께 랑그독의 9개 마을에서도 생산된다. 생산 면적으로 볼 때 VDN 중 가장 중요한 와인으로 볼 수 있다. 그르나슈 누아/그리/블랑, 마카뵈와 함께 말부아지 뒤 루시옹도 쓰이며 리브잘트 앙브레(Rivesaltes Ambrés) 와인에는 뮈스카(Muscat)가 20%까지 배합되기도 한다. * 컬러, 산화, 숙성 기간 등에 의한 분류: 그르나(Grenat), 로제(Rosé), 튈레(Tuilés), 앙브레(Ambrés), 오르다주(Hors d’Age), 랑시오(Rancio)
모리(Maury): 화이트 와인도 있으나 레드 와인이 주를 이루며 그르나슈를 75% 이상 블렌딩한다.
- 화이트 : 그르나슈 블랑, 그르나슈 그리, 마카뵈, 말부아지 뒤 루시옹, 뮈스카 달렉상드리(Muscat
d’Alexandrie), 뮈스카 아 프티 그랭(Muscat à petits)
- 레드 품종: 그르나슈, 카리냥, 시라
* 컬러, 산화, 숙성 기간 등에 의한 분류: 블랑, 그르나, 튈레, 앙브레, 오르다주, 랑시오
바뉼스(Balnyuls): 병, 배럴, 또는 큰 유리병 등을 이용하여 숙성한다. 그르나슈가 50% 이상 포함되어야 한다.
- 화이트 : 그르나슈 블랑/그리, 마카뵈, 말부아지 뒤 루시옹, 뮈스카 달렉상드리, 뮈스카 아 프티그랭
- 레드 품종: 그르나슈(50% 이상), 카리냥, 시라, 생소(Cinsault)
* 컬러, 산화, 숙성 기간 등에 의한 분류: 블랑, 리마주(Rimage), 로제, 튈레, 앙브레, 오르다주, 랑시오
바뉼스 그랑 크뤼(Banyuls Grand Gru): 목재 통에서 최소 30개월 이상 숙성해야 하는 등 일반 바뉼스에 비해 생산조건이 더욱 엄격하다. 그르나슈를 75% 이상 블렌딩 해야 한다.
뮈스카 드 리브잘트(Muscat de Rivesaltes): 뮈스카 달렉상드리와 뮈스카 아 프티 그랭 두 가지 품종으로 양조되며 수확 후 2월 1일까지 숙성해야 한다. 세련된 꽃 향과 감귤 및 살구 등 달콤한 과일 향이 두드러진다. 예외적으로 크리스마스 뮈스카(Muscat de Noël)는 수확한 해 11월 셋째 주 목요일부터 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