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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Aug 24. 2019

샴페인, 그 환희의 순간

어느 순간이든 샴페인이 필요하다.

환희의 순간 펑하고 터지는 샴페인(Champagne). 우승을 확정 지은 스포츠 팀 멤버들이 터져 나오는 샴페인을 서로에게 들이 붙거나, 화려한 파티에서 얇고 긴 샴페인 잔을 들어 건배하는 모습은 상당히 익숙하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거품은 에너지가 폭발하는 축제의 분위기와 딱 들어맞는다. 샴페인의 세리머니적 상징성은 와인 애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알고 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라는 얘기는 하지 말자. 샴페인은 성공에 대한 축하와 축복은 물론 그 어떤 자리에도 어울리며, 심지어 실패를 위로하는 데도 적절한 와인이니까.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샴페인에게도 그 자신을 위해 축배를 들 만한 순간들이 있었다. 샴페인의 역사는 기껏해야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700년 전후 탄생한 샴페인은 환희의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스타일과 품질을 확립했다.


1700년, “나는 별을 마시고 있다(?)” : 샴페인의 탄생

샴페인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돔 페리뇽(Dom Perignon). 17세기 말부터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였던 그는 기포의 압력으로 폭발한 병에 남겨진 와인을 마시고는 감동한 나머지 ‘나는 지금 별을 마시고 있다’라는 근사한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맹인으로 알려져 있기에 이 말은 더욱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시력이 많이 안 좋았을지는 몰라도 맹인이 아니었고, 거품이 이는 와인에 감동해 샴페인을 본격적으로 생산한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그는 샴페인 지역에서 생산한 와인의 기본 품질을 높이고, 종종 발생해 문제를 일으키는 와인 속 거품을 적절히 제어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샴페인 지역에서는 봄이 되면 셀러에서 보관하던 와인에 거품이 생기고, 심한 경우 폭발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악마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샴페인 지역의 서늘한 기후 탓이었다. 주요 와인 생산지 중 최북단에 위치한 샴페인은 익은 포도를 얻으려면 수확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발효할 시간이 부족했고, 효모는 추위가 시작되면 잔당을 남긴 채 발효를 멈췄다. 그 상태로 병입된 와인이 봄이 되어 따뜻해지면 재발효를 시작하면 병 안에서 탄산가스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와인은 거품을 포함하게 되었고, 당시의 조악했던 기술로 만든 유리병은 가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폭발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효모의 존재와 발효의 원리를 몰랐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은 악마의 장난으로 보일 만도 했다. 돔 페리뇽은 이런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우수한 기술로 만든 영국제 유리병을 도입했고, 마감 효과가 좋은 코르크를 마개를 사용했다. 또한 적포도에서도 맑고 깨끗한 화이트 와인용 포도즙을 얻을 수 있는 압착기를 개발했으며, 다양한 포도밭에서 생산한 와인을 블렌딩하여 풍미의 균형을 향상했다. 이는 샴페인 지역의 특징과 서늘한 기후를 이해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려는 노력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본격적인 샴페인 탄생의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돔 페리뇽은 샴페인의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프레스티지 샴페인의 대명사로도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돔 페리뇽 동상]


1818년, 별을 가리는 안개를 걷어내다 : 르뮈아주와 데고르주망

이후 샴페인은 영국 시장을 시작으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거품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거품이 있는 와인을 의도적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1729년 최초의 근대적 샴페인 하우스인 뤼나(Ruinart)가 설립되었다. 1743년에는 규모나 명성 면에서 현재 샴페인 시장을 대표하는 기업 모에 & 샹동(Moet et Chandon)의 전신이 되는 샴페인 하우스가 세워졌다. (최근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더욱 유명해진 록밴드 퀸(Queen)의 노래 <킬러 퀸(Killer Queen)>의 첫 가사가 바로 ‘She keeps Moet & Chadon in her pretty cabinet’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샴페인의 인기는 급등했고, 나폴레옹 전쟁의 기운을 타고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때까지 샴페인은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와인이 아니었다. 병 안에 이산화탄소를 채우는 2차 발효 후 남겨진 효모 찌꺼기 때문에 와인은 탁했고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공기방울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웠다. 1818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의 셀러 마스터인 앙트완 뮐러(Antoine Muller)는 이 불필요한 찌꺼기를 거품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제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푸피트르(pupitre)라는 V자를 뒤집어놓은 모양의 선반에 뚫린 구멍에 샴페인 병을 거꾸로 꽂아 매일 조금씩 돌려세우며 병목 쪽으로 효모 찌꺼기를 모은다. 이런 작업을 르뮈아주(remuage, 영어로는 riddling)라고 한다. 이렇게 찌꺼기를 병목으로 모아 놓으면 와인과 거품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찌꺼기만 병 밖으로 쉽게 배출할 수 있다. 이를 데고르주망(degorgement, 영어로는 disgorging)이라고 부른다. 르뮈아주와 데고르주망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가 마시는 샴페인은 밀맥주(weizen)처럼 불투명하고 탁할지도 모른다. 르뮈아주와 데고르주망이라는 무기를 장착한 샴페인은 파인 다이닝에도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게 되었고, 더욱 큰 인기를 누리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펀트(punt)가 없는 투명한 크리스탈 병에 담겨 러시아 황제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Louis Roederer Cristal)’은 르뮈아주와 데고르주망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샴페인 글라스에서 은하수처럼 빛나는 버블들을 즐길 수 있었을까.


[푸피트르, 그리고 르뮈아주를 하는 사람들]


1836년, 폭발을 막고 압력을 견뎌라 : 당도 측정계와 뮈즐레의 발명

거품이 있는 와인을 의도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와인을 담은 유리병에 충분한 거품을 만들기 위한 당분을 넣어주게 되었다. 문제는 당분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는 것. 당분을 너무 많이 넣는 경우 기압이 과도하게 높아져 튼튼한 유리를 사용해도 병이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높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폭발률은 25%에서 심한 경우 50%에 달했고, 셀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안면 보호를 위해 철제 마스크를 써야 할 정도였으니까. 샴페인 지역의 약사였던 장-밥티스트 프랑수아(Jean-Baptiste François)는 와인의 잔당과 기압 증가의 관계를 공식으로 정립하고, 잔당을 측정할 수 있는 계측기(sucre-oenometre)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적당량의 거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의 당분을 추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폭발률은 4%대로 급감했다. 이 연구를 독려한 것은 샴페인 하우스 자크송(Jacquesson)의 아돌프 자크송(Adolphe Jacquesson)으로, 뒤이어 그는 압력을 제어하기 위한 또 다른 장치인 뮈즐레(muselet)를 발명한다. 뮈즐레는 코르크가 튀어나가지 않도록 병목을 감싸는 철사로, 현재 샴페인은 물론 대부분의 스파클링 와인에 적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6기압에 이르는 샴페인 병 내부의 압력에도 코르크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뮈즐레를 제거할 땐 샴페인이 폭탄이나 총과 같은 흉기가 되지 않게 만들어 준 자크송을 기억하자. 물론 코르크가 날아가지 않도록 코르크 위에 엄지손가락을 단단히 고정한 채로.


1874년. 스위트에서 드라이로 : 브뤼의 탄생과 스타일의 변화

현재는 샴페인 하면 기본적으로 브뤼(brut) 스타일을 떠올린다. 리터당 12g 이하의 당분을 함유하는 드라이한 맛의 샴페인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샴페인 하면 기본적으로 달았다. 보통 리터당 100g 이상의 당분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심한 경우는 300g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디저트용 와인으로 취급됐다. 드라이(dry/sec) 혹은 엑스트라 드라이(extra dry/extra sec) 샴페인이 식사와 함께 즐기는 와인으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였다. 하지만 아직 드라이 샴페인의 시대는 아니었다. 페리에 주에(Champagne Perrier-Jouet)의 영국 대리인은 고객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1848년 최초로 도자주를 하지 않은 와인을 주문했다가 혹평과 함께 쫓겨나고 말았다. 이는 최초의 브뤼 스타일 샴페인이었지만 그는 세상을 너무나 앞서 갔던 것이다. 브뤼의 의미가 날것(raw)을 넘어 투박(crude)하거나 잔혹한(brutal)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으니까. 영광은 경쟁사였던 포므리(Pommery)에게 돌아갔다. 남편과 사별하고 포므리의 경영을 책임지던 루이스 포므리(Louise Pommery) 여사는 영국 시장의 가능성과 자신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하여 리터당 6에서 9g 그램 수준의 드라이한 샴페인을 출시했다. 이 ‘1874년 빈티지 브뤼 샴페인’은 1879년 영국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디저트라는 한정된 위치를 벗어난 샴페인이 더욱 일상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2월 달력도 끝이 보인다. 꽃피는 봄이 오면 로제 샴페인 한 병 챙겨 들고 꽃놀이 가는 것도 좋겠다. 아, 요즘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로제 샴페인을 처음 만들어 판 것은 뵈브 클리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보다 몇 년 앞서 뤼나(Ruinart)에서 먼저 로제 샴페인을 팔았던 기록이 발견되었단다. 아무렴 어떤가. 우린 선구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시원한 샴페인 한 잔을 즐기면 되는 것을.


*사진출처

- 돔 페리뇽 동상 : By Victor Grigas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6666400

- 푸피트르, 그리고 르뮈아주를 하는 사람들 : Par Comite Champagne - Travail personnel,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124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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