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술의 시대다. 알다시피 코로나 때문이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 가볍게 한 잔 걸치던 일상이 특별한 이벤트처럼 되어버린 지 벌써 2년째다. 그것조차 저녁 9시, 10시로 제한이 걸려 버리니 신데렐라보다 못한 신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홈술이 늘어만 간다. 홈술의 증가는 혼술의 증가로 이어진다. 1인 가구가 많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으로 대략 세 집 중 한 집은 혼자 사는 집이다. 혼자 살지 않더라도 가족과 시간이 맞지 않거나 가족이 술을 즐기지 않는다면 혼자 마실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혼술 하는 애주가는 늘어만 간다.
혼술러에게 인기 있는 주종 중 하나는 와인이다. 혼자 마시기에 소주는 청승맞고, 라거는 심심하며, 소맥은 과격하기 때문일까. 그에 비해 와인은 왠지 모르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술이다. 매일매일 다른 품종, 새로운 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좋다. 기분 따라, 안주 따라, 날씨 따라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너무나 다양하다. 알코올 도수도 적당하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다. 그런데 와인을 제대로 즐기려면 약간의 도구가 필요하다. 와인은 그냥 취하기 위한 게 아니니까. 이왕이면 제대로 와인의 맛과 향을 즐겨야 하니까. 그렇다고 뭐 대단한 장비와 액세서리들을 갖추자는 말은 아니다. 외려 너무 고급스럽고 화려한 장비들은 쓰기도 불편하고 관리도 부담스럽다. 그저 편하게 사용할 와인잔과 적정 온도를 유지해 줄 쿨러, 마시다 남은 와인을 안전하게 지켜 줄 도구 정도는 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얘기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와인 라이프를 추구하는 분이라면 지금 바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면 된다. 이 글은 귀차니즘 충만한 게으르니스트 혼술러를 위한 것이니까.
우선 와인잔. 와인 글라스 종류도 와인만큼이나 다양하다. 브랜드마다 등급 별, 품종 별로 나뉘어 있어 어떤 걸 사야 할지 난감하다. 품종 별로 다 모으자니 종류가 너무 많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찬장이나 선반 자리는 왜 이리 많이 차지하는지. 관리는 더 힘들다. 커다란 보울에 얇은 스템이 달려 있는 고급 와인잔은 와인의 풍미를 완벽히 이끌어내는데만 알맞은 것이 아니다. 마신 후 설거지하다가 깨뜨리기도 딱 알맞다. 잔의 품질이 좋은 만큼, 스타일 별로 다양한 만큼 이래저래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 선택할 만한 해결책, 바로 스템리스 와인 글라스(stemless wine glass)다. 스템이 없어 언뜻 보면 와인 글라스 같지 않다. 하지만 스템만 없을 뿐 나머지는 일반 와인 글라스와 같다. 보울의 폭이 넓고 끝부분은 모여 있어 와인의 향을 충분히 모아 준다. 얇은 림 덕분에 입술에 닿는 촉감도 좋다. 보울 중간에 곡선을 넣어 공기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동시에 그립감을 개선한 제품도 있다. 설거지와 보관이 매우 간편함은 물론이다. 스템리스 글라스도 품종 별로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굳이 여러 종류 살 필요 없다. 본인이 선호하는 브랜드로 손에 잘 붙는 디자인을 골라 1~2개 정도 구비하면 충분하다.
두 번째는 와인 쿨러. 와이트 와인을 칠링하기 위해서는 보통 아이스 버킷에 얼음과 물을 채워 사용하는데 이게 은근히 귀찮다. 제법 무겁고 크기도 제법 커서 테이블이 좁다면 놓을 곳간을 마련하는 것도 일이다. 게다가 겉면에 응결되는 습기와 와인을 꺼낼 때마다 떨어지는 물 때문에 바닥이 축축해지기 일쑤다. 만약 아이스 버킷을 엎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이런 단점을 한 번에 해결해 줄 신박한 아이템, 바로 와인 슬리브(wine sleeve)다. 슬리브 안에 냉매가 들어 있어 냉동실에서 얼린 후 와인 병에 씌워 주기만 하면 되니 편리하다. 슬리브 표면에 약간의 습기가 맺히긴 하지만 아이스 버킷에서 꺼낸 와인병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이스 버킷에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리넨 천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더욱 간편하다. 한여름엔 레드 와인의 온도가 지나치게 올라가는 걸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단, 실온의 화이트 와인을 슬리브로 칠링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능도 떨어지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은 미리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마실 때 꺼내서 슬리브를 씌우는 것이 좋다. 그러면 두어 시간 정도는 시원한 상태가 무리 없이 유지된다. 참 쉽다.
마지막으로 마시던 와인이 남았을 때 유용한 도구를 소개한다. '와인이 왜 남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혼술은 함께 마시는 술과는 다르다. 모임에서는 '각 일병'이 쉬워도 혼술로 한 병을 다 비우는 건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하프 보틀만 찾기엔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 결국 와인이 남으면 뽑아낸 코르코를 뒤집어 다시 끼운 후 보관하는 경우가 많은데, 와인 맛이 너무 쉽게 변해 버린다. 사은품으로 받은 마개를 써도 결론은 같다. 와인 맛을 변하게 하는 건 마신 와인만큼 와인 병 안에 들어간 산소니까. 그래서 남은 와인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분께는 코라뱅(Coravin)을 추천한다. 코르크를 뽑지 않은 상태로 주삿바늘 같은 얇은 바늘을 넣어 필요한 만큼만 와인을 뽑아낼 수 있고, 빈 공간은 아르곤 가스를 채워 와인의 변질을 막아 준다. 그러면 몇 달에서 몇 년 까지도 변질 없이 보관할 수 있다니 가히 혁신적인 도구다. 다만 그랑 크뤼 와인 값에 필적하는 가격이 문제다. 아르곤 가스도 주기적으로 구매해야 한다. 와인을 빼는 바늘 청소도 해야 한다. 귀차니스트 혼술러에게는 이래저래 번거로울 수 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할 만한 것이 배큐 빈(Vacu Vin)이다. 배큐 빈은 남은 와인 병에 마개를 끼운 후 펌프로 병 속의 공기를 뽑아내는 방식이다. 코라뱅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대신 훨씬 편하다. 남은 와인 병을 동봉된 마개로 막고 펌프질 몇 번만 하면 끝이니까. 와인 스타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2~3일에서 길게는 열흘 정도까지 와인을 마실 만한 상태로 유지해 준다. 가격이 저렴하고, 추가 구매할 것도 없으며, 오래 사용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반주나 나이트 캡으로 매일 와인을 1~2 잔 정도 드시는 분들께 안성맞춤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역병을 원망하면서도, 애주가들은 어떻게든 살길을 찾고 있다. 고군분투하는 혼술러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