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ot Noir)
피노 누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로마네 꽁티(Romane Conti)가 대표하는 부르고뉴 그랑 크뤼일 것이다. 그 정도로 피노 누아의 이미지는 섬세하고 귀족적이며 고급스럽다. 이런 이미지는 만화 <신의 물방울> 덕분에 더욱 강화되었다. 코르크를 여는 순간 펼쳐지는 오색창연한 꽃밭, 딸기, 체리 등 붉은 과일이 가득한 바구니, 그늘진 숲 속 연못가의 유혹적인 여성 등등. 뭔가 대단해 보이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묘사들을 부정하고픈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으니까. 10여 년 전쯤 와인 초보자들이 모여 도멘 르루아의 본 로마네(Domaine Leroy, Vosne Romanee)를 시음한 적이 있었다. 테이블 저쪽 끝에서 첫 잔이 따라지는 순간, 반대쪽 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한 마디를 던졌다. "어디서 꽃향기가 나." 병이 모두 비워지자 각자의 잔에는 작은 꽃밭이 일구어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와인들은 점점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일단 생산량이 너무 적다. 그랑 크뤼, 프리미어 크뤼는 고사하고 본 로마네나 즈브레 샹베르탱(Gevrey Chambertin) 같은 마을 단위 부르고뉴 와인들도 전부 한정된 지역에서 나오기에 생산량을 무작정 늘릴 수 없는 탓이다. 전형적인 독과점 시장이랄까. 공급보다 수요가 월등히 많으니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마을 단위 이상의 부르고뉴 와인들은 10년 전과 비교하기 무서울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 한 병을 마시려면 월급까지는 아니어도 한 달이나 한 주 용돈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몇 년 전인가, <디캔터(Decanter)>지의 칼럼니스트 앤드류 제포드(Andrew Jefford)도 '셀러링을 위한 그랑 크뤼급 와인 구입을 포기했다'는 푸념 섞인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상황을 반영한 말이 아니었을까. 지역 단위 와인도 마찬가지다. 명성 높은 도멘의 부르고뉴 피노 누아 가격은 어지간한 마을 단위 와인에 필적한다. 가난한 애호가의 희망이었던 부르고뉴 오뜨 꼬뜨(Bourgogne Hauts-Cotes)의 가치도 점점 오르는 추세다. 피노 누아 애호가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딱히 마땅한 대체제가 없다는 데 있다. 아니, 없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피노 누아 애호가들의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충성심은 엄청나서 다른 지역의 피노 누아는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피노 누아는 섬세한 품종이기 때문에 토양과 기후, 양조방법 등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마디로 '떼루아(Terroir)'에 민감한 품종인 것이다. 피노 누아는 껍질이 얇아 색상이 옅으며 풍미는 가볍고 섬세하다. 때문에 다른 품종에 비해 다양한 스타일로 양조하기 어렵다. 또한 와인의 전체적인 미감이 타닌보다 산미에 좌우된다. 때문에 과도하게 익어 신선한 산미가 부족한 피노 누아는 매력 없는 평범한 와인이 되어버린다. 서늘한 기후 조건이 필요한 이유다. 부르고뉴는 이런 조건을 갖춘 유일무이한 산지로 인식되었고, 오랜 기간 노하우를 쌓아 그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최근에는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도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 오리건(Oregon)이다. 오리건에는 이미 1960년대에 피노 누아가 식재되었고, 1970년대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오리건 피노 누아가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누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런 점을 눈여겨본 도멘 드루엥(Domaine Drouhin), 루이 자도(Louis Jadot) 등 부르고뉴의 유명 생산자들은 일찌감치 오리건에 둥지를 틀었다. 포도 생육기간 동안 오리건의 기온은 부르고뉴보다 좀 더 서늘한데, 맑고 건조한 날씨가 유지되기 때문에 피노 누아 특유의 드라이하고 가벼운 풍미와 섬세함이 잘 드러나는 와인을 생산한다. ‘피노 누아는 오리건에 새로운 거처를 찾았다’고 할 정도로 오리건의 피노 누아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며, 업계와 애호가의 평가 또한 상당히 높다. 이번 기사에서는 아쉽게도 제외되었지만 오리건 피노 누아는 꼭 찾아서 마셔볼 만한 가치가 있는 와인이다.
미국 와인의 중심 캘리포니아에서도 양질의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 전반적으로 부르고뉴에 비해 기온이 높고 일조량 또한 많기 때문에 색상이 진하고 달콤한 과일 풍미가 더욱 부드럽게 표현된다. 흙내음은 적고, 타닌 또한 실크처럼 부드러우며 밸런스가 좋은 스타일이다. 지역 별로도 차이가 있다. 나파 밸리(Napa Valley)의 피노 누아는 달콤한 과일 풍미와 함께 알코올이 높고 힘 있는 스타일, 소노마 밸리(Sonoma Valley)는 완숙 과일 풍미와 우아함을 겸비한 스타일이다. 남쪽의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에서는 신선한 과일 풍미에 산도가 매력적인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 몬터레이(Monterey)의 피노 누아는 가장 진지한 스타일로 잔잔하면서도 스케일이 크다.
뉴질랜드 또한 서늘한 기후에서 최상급 피노 누아를 만드는 산지로 점차 명성을 높여 가고 있다. 전 세계 와인 산지 중 최남단에 위치한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는 큰 일교차를 보이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이다. 일조량은 넉넉하고 강수량은 매우 적어 양질의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 최적이다. 피노 누아 애호가라면 지속적으로 주목해야 할 지역. 마틴버로(Martinborough)는 뉴질랜드 최초의 피노 누아 생산지로 올드 바인이 많다. 때문에 재배 면적은 적지만 풍미의 집중도가 높은 고품질 와인을 생산한다.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품종으로 유명한 말보로(Marlborough) 피노 누아는 비교적 온화하고 밝은 과일 풍미를 드러낸다.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칠레는 어떨까. 칠레 하면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혹은 까르메네르(Carmenere) 등으로 대표되는 강하고 묵직한 와인이 대세였다. 하지만 최근 칠레 와인의 스타일이 전반적으로 섬세하게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피노 누아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칠레 피노 누아의 대표적인 생산자 코노 수르(Cono Sur)는 이미 세계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카사블랑카 밸리(Casablanca Valley), 산안토니오 밸리(San Antonio Valley) 등 해안 지역이나 비오비오(Bio Bio) 등 남쪽 서늘한 지역에서 양질의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 엔트리급 와인이든 프리미엄 와인이든 칠레의 피노 누아를 맛본다면 아마 그 품질에 깜짝 놀랄 것이다. 옆 나라인 아르헨티나는 피노 누아 재배 지역이 많지 않다. 하지만 멘도사(Mendoza) 지역에서 몇 가지 양질의 피노 누아가 생산되며, 남쪽 파타고니아(Patagonia) 지역은 큰 일교차와 서늘한 기후로 인해 피노 누아 재배에 최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전 세계 어떤 피노 누아와도 다른, 지역적 개성이 드러나는 새로운 스타일의 피노 누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부르고뉴의 대항마는 주로 미국, 뉴질랜드와 호주, 칠레 등 유럽 외에 많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 내에도 알자스(Alsace), 루아르(Loire) 등지에서 개성 있는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 심지어 너무 온화해 피노 누아 생산에 적합하지 않다고 인식되는 랑그독(Languedoc) 지역에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피노 누아가 제법 많이 나온다. 이번에 소개하는 랑그독의 피노 누아 또한 저녁 식탁이나 피크닉과 함께 하기 부담 없는 스타일이다. 이외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주목할 만한 피노 누아 생산국이다. 이탈리아도 많지는 않지만 북중부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피노 누아를 제법 생산하는데, 이번 기사에서도 두 가지 와인을 소개한다.
피노 누아는 까다로운 품종으로 인식되는 만큼 부르고뉴 근본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생산자들의 끊임없는 노력, 사회적 환경과 기후의 변화 등으로 세계 각지에서 수준급 피노 누아 와인들이 생산되고 있다. 물론 부르고뉴는 여전히 훌륭하다. (이번 기사에서도 두 종의 매력적인 와인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본다면 더욱 다채로운 피노 누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인 월드도 계속 변하고 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