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인 척한 고냥이 Oct 26. 2021

포도 품종 : 그르나슈

(Grenache)

By Josh McFadden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IMG_3353, CC BY-SA 2.0, https://commons.wikimedia.

‘가장 좋아하는 품종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와인 애호가들의 답변은 각양각색이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견고한 양대산맥이 있다고는 하나, 취향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메를로(Merlot), 시라(Syrah) 혹은 쉬라즈(Shiraz)의 팬은 상당히 많다. 네비올로(Nebbiolo)나 산지오베제(Sangiovese)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파도 있다. 템프라니요(Tempranillo)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미국의 진판델(Zinfandel)이나 칠레의 카르미네르(Carmenere), 아르헨티나의 말벡(Malbec)을 꼽는 경우도 보았다. 샤르도네(Chardonnay), 리슬링(Riesling),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같은 화이트 품종들도 자주 입에 오른다. 최근 뜨는 쥐라의 사바냉(Savagnin)이나 포르투갈의 토우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을 언급하는 개성파도 보았다. 물론 ABC(anything but Chardonnay, 한국에서는 anything but Cabernet인 경우도 있다)를 외치는 반골 기질의 애호가도 있고, 품종이 아니라 지역이 중요하다는 ‘테루아 주의자’들도 있다. 어쨌거나 와인을 접한 뒤 한 번도 가장 좋아하는 품종이라고 언급되는 것을 듣지 못한 품종이 있으니, 바로 그르나슈(Grenache)다.


세상에는 수천 종의 양조용 포도 품종(Vitis Vinifera)이 있는데 그 무슨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르나슈는 경우가 다르다. 프랑스만 해도 남부 론을 시작으로 프로방스와 랑그독 루시옹까지 널리 재배된다. 국경을 넘으면 스페인 동북부와 중부에 이르기까지 그 영토는 더욱 넓다. 그 안에는 프리오랏과 리오하 등 스페인 대표 산지가 모두 포함되니 그 중요성 또한 더할 나위 없다. 유럽 밖으로 나가도 마찬가지다. 호주에서는 대표적 블렌딩 와인인 GSM(Grenache, Shiraz, Mataro)의 첫머리에 이니셜을 남기며, 미국에서는 명성 높은 론 레인저들(Rhone Rangers)의 주재료로 사용된다. 생산량으로 보나 중요성으로 보나 그르나슈는 절대 홀대받을 품종도, 흐린 기억 속으로 사라질 품종도 아니다.


그르나슈 품종으로 양조한 와인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높은 알코올, 풍만한 바디, 그리고 낮은 산미다. 또한 옅은 선홍색은 산화에 약해 빠르게 갈변한다. 그러나 소출이 적은 올드 바인에서 얻은 그르나슈는 이런 모든 평가를 비웃듯 짙은 컬러와 밀도 높은 풍미, 그리고 높은 산미를 지닌 와인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체리와 라즈베리, 특히 잘 익은 딸기 풍미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그르나슈는 데일리 와인을 위한 친근함과 위대한 와인을 위한 잠재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게다가 새 오크에 숙성하지 않아도 빼어난 풍미를 드러내는 미덕을 가진 품종이기도 하다.


이런 그르나슈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역은 남부 론이다. 꼬뜨 뒤 론(Cotes du Rhone)과 같은 대중적인 와인부터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 지공다스(Gigondas), 바케이라스(Vacqueyras) 등 명성 높은 와인들도 모두 그르나슈의 덕을 봤다. 이는 그르나슈가 더위와 가뭄에 강한 품종으로,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샤토네프 뒤 파프의 자갈밭은 물론 메마른 편암과 화강암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때문에 프랑스 남서부 랑그독 루시옹(Languedoc-Roussillon) 지역에서도 카리냥(Carignan), 무르베드르(Mourvedre)와 함께 그르나슈를 주요 품종으로 이용한다.


그런데 사실 그르나슈의 고향은 프랑스가 아니다. 남부 론의 대표 품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기원은 스페인의 아라곤(Aragon)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틴토 아라고네스(Tinto Aragones)라고 불리던 그르나슈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루시옹과 랑그독을 지나 남부 론까지 넘어왔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가르나차(Garnacha)라고 하는 그르나슈는, 현재도 스페인의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스페인 북중부 나바라(Navarra)는 올드 바인 가르나차로 고급 와인을 만들며, 그 남서쪽에 면해 있는 리오하(Rioja)에서도 템프라니요의 보조 품종으로 가르나차를 사용한다. 카탈루냐 지역, 그중에서도 프리오랏(Priorat)에서는 그르나슈의 중요성이 한층 높다. 까리네냐(Carinena, =Carignan) 품종과 함께 필록세라로 황폐화된 프리오랏의 부활을 이끈 품종이기 때문이다. 덥고 건조한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가르나차는 연평균 강수량이 400mm를 밑도는 프리오랏의 건조한 기후와 리코레야(Licorella)라는 독특한 테루아에 최적이다. 올드 바인 가르나차는 뿌리를 길게 뻗어 리코레야의 단층 속에 존재하는 습기를 흡수해 극도로 농축된 풍미를 지닌 포도를 생산하며, 이는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프리미엄 프리오랏 와인의 근간이 된다.


최근에는 유럽 바깥에서도 그르나슈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주로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둔 생산자 연합인 론 레인저스(Rhone Rangers)가 그르나슈를 비롯한 론 밸리 품종들을 사용해 빼어난 와인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워싱턴과 오레곤, 미시간 등지로 확산되는 추세다. 호주 남부에서는 올드 바인 그르나슈에 쉬라즈와 (호주에서는 마타로라고 부르는) 무르베드르를 블렌딩 한 GSM이 확고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그르나슈를 80% 이상 메인 품종으로 사용하거나 심지어 단독으로 양조한 프리미엄급 와인도 제법 보인다. (아래 소개하는 ‘매티스 그르나슈(Mathis Grenache)’와 '투핸즈 아에로페(Two Hands Aerope)’를 보라!)


이외에도 프랑스의 타벨(Tavel), 프로방스(Provence), 스페인 나바로 등의 로제 와인이나, 스페인의 전통 방식 스파클링 와인인 카바(Cava)의 로제 스타일을 양조하는 데도 그르나슈를 사용한다. 루시옹의 특별한 주정강화 와인 바뉼스(Banyuls)는 그르나슈를 최소 50% 이상(그랑 크뤼는 75% 이상) 사용해야 한다. 레드, 로제, 스파클링, 주정강화 와인에 이르기까지 이만큼이나 다양한 그르나슈의 세계, 충분히 빠져들만한 매력이 있지 않을까. 국내에 출시된 다양한 그르나슈 와인들을 만나보면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