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쯤 시작한 올해 장마는 이번 주먼 끝날 예정이라고 한다. 예년과 비슷한 한 달 남짓의 기간이다. 하지만 늦게는 9월까지 지속될 태풍의 방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가 지속되면 흐린 날씨가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몸의 활력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하기도 어렵다. 가뜩이나 코로나 19로 인한 심난한 상황인데 우중충한 날씨가 활동량을 줄여 기분을 더욱 꿀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우기 스트레스를 날리는 데 효과적인 것이 바로 독서다. 독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근육을 이완시켜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줄여 준다. 독서가 산책이나 음악 감상, 컴퓨터 게임보다 스트레스 해소에 더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편안히 앉아 책을 읽는 것 만으로 스트레스를 툭툭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와인 애호가라면 좋아하는 와인 한 잔 따라 놓고 와인 관련 서적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와인 구매와 음주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와인 러버의 자전적 에세이부터 언젠가 본 영화 속에 등장한 와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최근 핫한 오렌지 와인(orange wine)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 개론서까지 읽을 만한 책이 수두룩하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에 몰입하다 보면 장마철의 우울한 기분은 어느새 사라져 버릴 것이다.
슬기로운 방구석 와인 생활을 위해,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책 제목만 봐도 저자의 와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 책은 술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특히 와인은 시큼하고 떨떠름한 맛없는 술로 여겼던 저자가 와인에 홀딱 빠져 허우적대다 발견한 사실들을 담은 와인에 대한 간증서다.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영접하는 신비한 체험을 한 후 열렬한 전도사로 거듭난 사도 바울의 이야기처럼, 호기심에 한 번 마셔 본 와인에 푹 빠져 5년 만에 '가산 탕진형 와인 애호가'로 거듭난 저자의 경험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어쩌면 와인 애호가의 길로 들어선 많은 이들도 맨 처음엔 저자처럼 와인을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마셨던 와인을 반 병도 못 비우고 수챗구멍에 콸콸 쏟아버렸던 나도 그랬으니까.
일단 저자의 이력이 특이하다. 공대를 졸업하고 연구원이 되었지만, 학창 시절 읽은 <자본론>의 충격을 잊지 못해 사회과학 책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었다. '아니, 마르크스주의자가 와인이라고?'라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사실 마르크스 본인이 고급 와인을 즐기는 와인 애호가였다.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출간한 엥겔스도 행복이 뭐냐는 질문에 '샤토 마고(Chateau Margaux) 1848년 빈티지'라고 대답했다지 않은가. 어쨌거나 금수저도 아니고 생계형 작가일 뿐이었던 저자의 주머니 사정은 여느 소시민과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연구원 출신답게(?) 꼼꼼히 연구해 체득했고, 그렇게 얻은 꼭 필요한 정보들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예를 들어 기본적인 와인 레이블 읽는 법부터 바가지 쓰지 않고 와인 구매하는 법, 어울리는 와인 안주 고르는 법, 와인 잔 선택 법,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꿀팁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와인을 마시는 데 꼭 필요한 알짜 정보들이 가득하다. 중간중간 수록한 '2만 원대 최강 와인'이나 '비 오는 날 추천 가성비 와인' 같은 항목들은 당장 대형 마트나 백화점 와인 코너에서 와인을 고를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구매 가이드 역할까지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존 와인 이론서나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가득 담긴 와인 에세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캐주얼하게 쓴 책이지만 중간중간 슬기로운 와인 생활을 위한 조언들이 알차게 녹아 있다. 읽다 보면 저자의 '진심'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영화에 나왔던 와인이 이거였구나! <와인이 있는 100가지 장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살바도르 달리가 주인공을 위해 주문한 와인은? <킹스맨>의 악당이 햄버거와 잘 어울린다며 페어링 하는 와인은? 이외에도 영화를 보다가 '어, 저 와인은…?' 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이 바로 정답지다. 그냥 정답지가 아니라 관련된 내용을 흥미롭게 풀어주는 해설까지 겸비한 모범 답안지라고나 할까. 16개 와인 생산국 500여 와이너리를 함께 방문하고 와인 여행 책을 출간했던 소믈리에 아내와 와인 저널리스트 남편이 이번에는 영화와 와인을 엮어 책을 냈다. 알고 보니 아내는 대학 시절 연출을 전공한 영화학도였고, 남편 또한 영화에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부창부수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커플이다. 스포일러가 될락 말락 한 짧은 영화 줄거리와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쉽게 풀어낸 와인 이야기에 만화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바르셀로나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내용에 딱 맞는 그림을 더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와인쟁이 부부가 선정한 100가지 영화 중에는 <사이드웨이>,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구름 속의 산책>, <와인 미라클> 같은 대표적인 와인 영화들도 있다. 다른 영화들도 대부분 완성도 높은 명작들이라 책을 읽고 나면 몇 편 정도는 직접 보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언제 그 와인이 등장할지 두근거리며 영화에 집중하고, 그 와인이 등장하는 맥락과 의미를 곱씹다 보면 아마도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마철을 슬기롭게 보내는 또 하나의 방법을 얻은 것은 덤이다.
오렌지 와인은 오렌지로 만드는 게 아니었어? <앰버 레볼루션>
와인은 포도를 발효해 만든 과실주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과일로 만든 발효주에는 와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지만 와인 양조 전통이 일천한 한국에서는 다른 과일로 만든 과실주에도 와인이라는 이름을 종종 사용한다. 오미자 와인, 감 와인, 사과 와인… 심지어 막걸리를 영어로 라이스 와인(rice wine)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오렌지 와인(orange wine)도 오렌지로 만든 와인 아닌가? 물론 아니다. 오렌지 와인이란 청포도 품종을 마치 적포도처럼 며칠, 몇 주, 혹은 몇 개월 간 껍질, 씨, 줄기 등과 함께 발효시켜 오렌지 색을 띠는 와인을 말한다. 오렌지 와인의 오렌지는 과일이 아닌 ‘오렌지 색’을 의미한다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와인을 분류할 화이트, 레드, 로제 등 컬러를 중심으로 분류하는 데 착안한 명칭이다. 일반화하자면 적포도를 껍질 등과 함께 발효하면 레드 와인, 껍질 등을 빨리 제거하고 발효하면 로제 와인이 된다. 청포도의 경우 즙으로만 발효하면 화이트 와인, 껍질 등과 함께 발효하면 오렌지 와인이 되는 것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아래 그림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원래 오렌지 와인은 오랜 옛날부터 양조되던 와인이다. 5천여 년 전부터 조지아에서는 크베브리(Qvevri)라는 아래가 뾰족한 항아리 모양의 커다란 토기에 포도를 넣고 커다란 돌과 밀랍으로 봉인해 와인을 만들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Friuli) 등에도 유사한 전통이 있었지만, 현대 양조 기법이 도입되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일부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오렌지 와인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세계적인 호응을 얻으며 부활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이 책은 오렌지 와인 부흥의 배경과 그라브너(Josko Gravner), 라디콘(Radikon) 등 주요 생산자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읽다 보면 오렌지 와인의 지향점과 가치, 그리고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여러 나라의 주목할 만한 생산자를 소개하기 때문에 바잉 가이드로 활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이 혼동하는 개념 하나 더. 오렌지 와인은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일까? 정답은 ‘no’다. 오렌지 와인은 내추럴 와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앰버 레볼루션>을 읽다 보면 그 차이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인 스타일이지만 와인 트렌드의 정점에 있는 오렌지 와인의 세계로 빠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