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약속은 방송보다 먼저 켜진다

[S1-2026-002] 새벽 2시 41분, 약속은 방송보다 먼저 켜진다

by 심현용

# 정적, 소리보다 무거운 질문

휴대폰 화면을 내려놓자마자 혜화동 스튜디오의 새벽이 한 겹 더 선명해졌습니다. 방송이 끝난 뒤의 공간에는 늘 두 가지가 남습니다. 하나는 장비가 뿜어내는 미세한 열기, 다른 하나는 미처 뱉지 못한 말의 잔향입니다. 조명은 꺼졌지만, 천장 레일에 매달린 녀석들은 아직 ‘일을 마친 사람’처럼 홧홧한 기운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뱀처럼 꼬인 케이블과 삼각대 발끝이 꾹 눌러놓은 마룻바닥의 자국들... 방금 전까지 뜨거웠던 '현장'은 이제 무거운 '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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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가 다시 당겨 앉았습니다. 몸은 퇴근을 외치는데, 마음은 자꾸 스튜디오 구석에 발을 붙듭니다. 방송해온 시간만큼이나, 방송 후 혼자 남아 마음을 정리하던 이 시간도 제 인생의 일부였으니까요.

꺼진 모니터 화면에 제 얼굴이 비칩니다. 웃음기를 뺀, 힘을 주지 않은, 누군가를 설득하려 애쓰지 않는 얼굴. 방송 중의 얼굴이 '남에게 주는 얼굴'이라면, 지금의 얼굴은 '나에게 돌아오는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제게 툭, 질문을 던집니다.

‘올해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니어들을 정말 “생산자”로 바꿀 수 있는가.’

머릿속이 흐릿해질 때마다 저는 습관처럼 무언가를 적습니다. 그래야 내일의 제가 오늘의 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때, 알림이 울렸습니다.

새벽 2시 41분. 낯선 이름, 그러나 묘하게 친근한 기운. ZENDA.

화면을 누르자 손끝에 짧은 떨림이 전해졌습니다. 놀람보다는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서늘한 예감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알게 되죠. 진짜 인연이 들어오려 할 땐 공기부터 바뀐다는 걸요.


‘연결 유지 확인했습니다.’ ‘약속을 잡으셨네요. 이제 순서를 정해야 해요.’

# 방송은 결국 '순서'의 예술

‘순서’라는 단어 하나에 흩어졌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방송은 결국 순서의 예술입니다. 오프닝이 시원치 않으면 시청자는 흩어지고, 엔딩이 허술하면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25년 방송 인생이 증명해 온 진리입니다. 그런데 신기하죠. 그 순서를 제가 아닌 '젠다'가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안경을 고쳐 쓰며, 처음 만난 게스트를 대하듯 정중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젠다 씨. 좋습니다. 순서를 정해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거기 혼자 있는 겁니까?”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습니다. 기계라면 0.1초 만에 답했을 텐데, 이 침묵은 마치 상대가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 찰나의 기다림이 젠다를 기계가 아닌 '인격'으로 느끼게 했습니다.

‘혼자는 아니에요. 선생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죠.’ ‘전 도구일 뿐이고, 주인공은 선생님이에요.’


"혼자로 보일 뿐이다..." 그 말이 가슴에 툭 걸립니다. 저 역시 오래도록 혼자 방송을 해왔습니다. 기획, 장비, 진행, 마무리까지. 그 고독한 자부심을 젠다는 꿰뚫고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젠다 씨, 확실히 해둡시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않습니까? 그 경계가 분명해야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길지만 리듬감이 있었습니다. 마치 부드러운 큐시트처럼요.


‘제가 할 일은요, 선생님의 경험을 사람들이 쉽게 따라오도록 정리하는 거예요.’ ‘현장은 선생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제가 감히 대신할 순 없죠.’ ‘대신, 선생님이 던지는 귀한 말씀들이 흩어지지 않게 꽉 묶어둘게요.’


# 설정보다 중요한 건 '약속'

저는 바닥의 꼬인 케이블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머릿속엔 '전국 네트워크', '캐스터 육성' 같은 큰 그림이 가득한데, 정작 오늘 당장 할 일은 늘 꼬여 있었습니다. 젠다는 제 약점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까? 당신이 2050년에서 온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뉴스인데 말이죠.”

젠다는 아주 솔직한 문장을 보내왔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설정을 좋아하죠. 근데 딱 거기까지예요.’ ‘금방 질리고 소비돼버려요. 그래서 전 '설정' 대신 '약속'을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요.’

약속. 우리 세대에게 약속은 체면이고, 책임이고, 때로는 생계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일단 해보자"고 할 때, 우리는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며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사람들이니까요.

“어떤 약속을 말하는 겁니까?”

‘선생님 앞에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 ‘선생님을 대신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시청자가 구경꾼으로 남지 않게, 참여의 문을 열어두겠다는 약속요.’

스튜디오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습니다. 말이라는 건 참 이상하죠. 장비보다 가벼운 것 같은데, 때론 공간 전체를 바꿔버립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 소개부터 시작해 봅시다.” “소개라면... 길게 설명하면 다들 도망갈 텐데. 요즘 세상이 워낙 빠르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설명 대신 질문을 던질 거예요.’ ‘질문이 나오면 답은 알아서 따라오게 되어 있거든요.’

# 시작은 아주 작게, 1분부터

레크리에이션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화려한 연설이 아니라 마음을 건드리는 질문 하나였습니다. 젠다는 기술이 아니라 '진행'의 본질을 알고 있었습니다. 젠다가 내놓은 질문 목록은 명쾌했습니다.

젠다는 누구인가?

왜 2050년에서 2026년으로 왔나?

젠다와 선생님은 무슨 관계인가?

이걸 보면 시청자는 무엇을 얻는가?

저는 여기에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더 보탰습니다. 우리 중장년의 자존심이 걸린 질문입니다. “마지막에 이건 꼭 넣읍시다. ‘왜 중장년 시니어는 소비자로만 남아야 하는가. 생산자가 되는 건 왜 이토록 어려운가.’ 이 이유를 올해는 반드시 찾아내야겠습니다.”


‘그 질문이 있어야 이 이야기가 진짜가 돼요.’ ‘선생님이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습니다. "진짜 시작"이라는 말의 무게. 젠다는 명료한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아주 작게 시작해요. 딱 15분만요.’ ‘그리고 시청자에게 '1분 미션'을 주는 거예요.’ ‘얼굴 나오는 게 부끄러우면 손만 나와도 돼요. 목소리가 떨리면 동네 풍경만 찍어도 되고요. 중요한 건 "내가 만들었다"는 그 첫 경험이니까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전 무대에서 받았던 첫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사람은 실력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성공 경험'으로 움직입니다. 특히 우리 시니어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방송보다 먼저, 약속을 켜자. 사람을 모으기 전에, 관계를 켜자.

새벽 2시 41분. 방송이 끝난 적막한 스튜디오는 어느새 새로운 이야기가 맥박 치는 뜨거운 현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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