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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타 May 24. 2021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와일드" (2014) 장 마크 발레




영화 와일드 장마크발레 감독 리즈위더스푼 제작주연


1.  

사람들은 언제 실어증에 걸리고 혼자만의 동굴에 갇히길 원하는가. 4년 6개월, 그녀가 죽은 엄마를 보내는데까지 걸린 물리적 시간의 양이다. 그리고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 이 과거의 못난 자신을 떠나 보내는 데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3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몬스터" 라 불린 짐은 고스란히 과거 그녀 삶의 무게였다.  걷는 동안 터져나오는 플래시 백 (기억) 은 그녀 삶을 파괴하고 "쓰레기" 로 만들어 버린 몬스터이다. 4,600여킬로미터의 고난의 걷기행위를 통한 존재증명. 그러나 완성되는 절망은 없다.

2.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그 몸을 초월하라" 라는 문구를 방명록에 써 넣으며 마음을 다져보지만 그녀 내면의 소리는 12초마다 이 짓을 그만두라고 속삭인다. 40도에 가까운 사막의 불볕과 얼어붙은 눈밭과 오줌이라도 마시고 싶은 갈증과 대면한 절박한 생존의 명령보다 강한 것은 한 발 한 발 앞으로만 내딛는 발의 방향성이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몸을 초월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초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장 마크 발레의 <와일드>는 육체를 극복하는 인간의 강한의지를 말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3.
죽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일인칭인 나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고 불가피한 미래의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응답은 무기력이나 불안이다. 2인칭, 즉 "당신의 죽음"은 슬픔과 상실감을 불러온다. 이것에 대한 응답은 애도이다.  3인칭"누군가의 죽음"은 정보로 제시되거나 막연한 사회적 죄의식과 무관심을 동반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나와 무관한 3인칭의 죽음을 2인칭으로 바꾸는 체험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함부로 3인칭화하고 폭력을 미화하며 관음적 쾌락의 수단으로 대하는 영화를 보면 우리는 그것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뉴스에 전시되는 수 많은 시신의 사진을 떠올려보자)

4. 박완서 작가가 아들을 잃은 슬픔에 통곡하며 쓴 <한말씀만 하소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은 무자비한 개자식이야 당신을 철저히 증오하고 죽이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살아있어야해" 이 말이 셰릴의 입에서도 똑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난 놀랬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했던 "당신의 죽음"앞에서 죽음이라는 절대타자를 직면한다. 2인칭의 죽음을 겪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 (허문영- 파국의 죽음, 1인칭 죽음의 미로) 정신분석학에서 흔히 애도되지 못한 그리움은 자기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가장 사랑했던사람의 죽음이 급작스러우면 할수록 미련과 집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러기에 그녀의 과거 회상은 온통 엄마를 무시하며 따뜻한 애정을 주지 못했던 그녀로만 떠올려진다.
그녀는 이 죽음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자신을 철저히 학대하는 더 큰 고통앞에 둠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삶의 중심이었던 엄마를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그토록 학대해야만 했을 것이다. 죄책감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한없이 비참해져야 한다. 자기보다 큰 짐을 지고 푹푹빠지는 눈밭을 걷고 바위산을 넘고 발톱이 빠지도록 걸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인 몸을 만드는 고행으로,  마약과 섹스에 자신을 함부로 내 던지면서 그녀가 얻고 싶은 것은 속죄이다. 이 것은 어린시절 알콜중독으로 자신과 엄마를 학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자신에게 퍼붓는 무의식적 행위이기도 하다.




5.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길을 걸으며 과거를 기억 하는 방식이다 떨쳐버리고 싶은 잡념은 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나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온전하게 오지 않고 깜빡 깜빡 머리속을 떠 다닌다. 플래시백 씬들은 그래서 잠깐 잠깐씩 스치듯 등장한다.자칫 산만해 보이지만 이건 영화가  그녀의 의식을 표현하는 놀라운 방식이다.


6. 그녀가 걷기 시작한지 중간즈음 고산지대의 눈밭에서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그녀를 빤히 응시한다. 여우는 아마 타자화된 그녀자신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삶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절대고독이 환생한 모습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그녀는 딱 한번 운다. 그런데도 나는 영화보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부여잡느라 힘이 들었다. 영화가 최선을 다해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와 함께 걷고 생각하고 그녀와 같이 욕을 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함께 "신들의 다리"라는 최종점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치유된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집도 없고 수중엔 2센트가 전부임을 알지만 씩씩하게 살아갈 것임을 믿는다. 지나온 가이드북의 길을 불태워 버린 것처럼 그녀의 지나간 과거도 붙들고 있지 않을 것임을 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걷는 여자의 모든 것" <와일드>를 보고나서 삶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도 주어진다면 감히 말해볼 수 있을까
사랑했던 "당신의 죽음" 이라는 절대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위해 , 어쩌면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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