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자신이 집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사진을 찍어왔다. 고시원방 한 칸 만한 크기의 방, 무질서한듯 보이지만 나름의 순서가 있는 듯 쌓인 책 여덟 권, 그리고 묘한 노란빛 스탠드, 그게 전부였다. 낮에 찍은 사진이었다는데 빛은 스탠드 조명 하나뿐이어서 낮인지 밤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왜 한낮에도 암실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빛을 좋아하는 주광성 동물이지 않은가. 날이 좋으면 창문도 열고, 환기를 시키며 빛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런 삶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어두운 곳을 싫어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어두운 곳은 사실 노래방과 피씨방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노래도 못하고, 게임도 못해서 노래방과 피씨방이 싫었는지,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에만 의존하는 그런 공간이 싫었는지 잘 모르겠다. 전자의 이유로 후자의 논리가 성립되었을 수도. 10대의 중고등학생이 갈만 한 곳이 노래방 아니면 피씨방이었기에 나는 늘 곤란했다. 차라리 주말 저녁 조명탑이 있는 인조잔디구장에서 축구를 하는게 좋았다. 온갖 핑계를 대며 어찌어찌 10대의 유흥 시설을 피해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밝은 곳만 찾아다녔다. 여전히 친구들 노래방과 피씨방을 좋아했고, 그 둘은 피하기 어려웠다. 술집이라는 유흥 시설 업종이 하나 더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행선은 노래방 아니면 피씨방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역시 나는 어설프게 어둠 공포증을 설명하며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래도 피씨방은 조금 나았다. 가서 게임은 안 해도 인터넷 서핑은 하고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게 지겨워질 때쯤 피파 온라인을 배워 친구들이 소환사의 협곡에서 놀 때 피씨방에서도 공을 찼다.
그런데 이제는 어둠 공포증을 핑계로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꽤 좋아하는 장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어두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지인이 연희동, 연남동 어딘가에 있는 카페가 너무 어둡고, 소리가 울려서 싫다고 했다. 그 이름모를 곳을 나는 단번에 맞췄고, 나는 그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이유는 어두워서였다. 소리가 울리는 것은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사실 그 마저도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아니라 백색 소음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부터 방에 불을 켜지 않고, 두 개의 모니터와 캔들 워머에서 나오는 빛에 의존해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에 태블릿으로 가사 없는 노래를 틀어 놓는다. 어두워야 집중이 잘 된다. 독서실이 왜 어두웠는지 알 법 하다. 어둠 속에서는 희미한 빛이라도 그곳에 집중이 된다. 아쉽게도 모니터에는 집중이 되지만 책을 읽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로켓 배송으로 도착한 모니터 스탠드 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