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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Feb 01. 2022

숫자보다 강했던 루틴


알고리즘은 무섭다. 테니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튜브에 테니스 관련 동영상이 자주 나왔다. 스페인 테니스 선수 Rafael Nadal의 특이한 루틴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알고리즘 덕이었다. Nadal은 매 경기 13가지의 루틴을 한다. 코트 위에 오를 때는 항상 오른발로 먼저 들어오고, 경기 중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와 물통의 위치는 상표가 코트를 향하게 대각선으로 놓고, 경기 중이 아닐 때는 라인을 밟지 않고 오른발로만 넘는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루틴은 아마 서브 전 바지 정리하고, 왼쪽 어깨 셔츠, 오른쪽 어깨 셔츠 정리, 코, 왼쪽 귀, 코, 그리고 오른쪽 귀 땀 닦기일 것이다. Nadal과 Medvedev의 호주 오픈 파이널 경기는 늘 그렇듯 Nadal의 루틴과 함께 시작되었다. 



Nadal은 86년생으로 현역 테니스 선수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베테랑이다. 6개월 전의 수술, 함께 테니스의 빅3라 불리는 Federer, Djokovic와 그랜드 슬램 타이틀 20회 동률을 이루고 있는 시점, 빅3 중 혼자만 Nadal 혼자 참여하는 상황 등 호주 오픈은 여러모로 관심을 끌었다. Nadal은 기어코 결승까지 올라갔고, 챔피언십을 두고 싸우는 상대는 현재 랭킹 2위이자 그보다 10살이나 어린 Medvedev였다. Nadal의 노소화와 Medvedev의 발전한 기량을 고려한 우승 예측 확률에서 Nadal은 30%를 간신히 웃돌았다. 경기 초반 서브 에이스 숫자에서부터 Medvedev는 Nadal을 확실히 앞섰다. Nadal은 2m 가까이 되는 상대에게 서브를 하는 것마저 부담스러워 했다. 더블 폴트와 언포스드 에러(실책)가 잦았다는 점에서 그 부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세트를 내주고 난 시점, Nadal의 실시간 우승 확률은 4%였다. 



사실 테니스 경기를 두시간 넘게 본 적은 처음이지만 2세트가 끝나고 너무 아쉬웠다. 2세트를 접전 끝에 6-7로 Medvedev가 가져가서 10살 많은 Nadal의 체력 소진은 물론, 한 세트를 더 지면 경기에서 질 Nadal이 경기 중 느낄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의 경기가 3세트에서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Nadal은 경기 중에 늘 하던 루틴을 정말 지겹게도 이어나갔다. 에너지드링크와 물통을 정리하고, 휴식 시간이 끝나면 상대방이 일어나고 나서야 일어났고, 서브 전에는 옷을 정리하고 땀을 닦았다. 유튜브에서나 보던 루틴이 화면에 지속적으로 잡히자 웃음이 나왔다. Nadal은 그 루틴 덕에 3세트를 따냈다. 우승 확률 10%로 4세트는 시작되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머니볼을 봐서 그런지 나는 숫자를 믿는다. 숫자는 데이터이며, 과학이다. 모든 현대 스포츠에서도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 관련 수치를 모두 기록한다. 야구의 출루율, 농구의 3점슛 성공률, 축구의 유효 슈팅 숫자. 경기 중간 나오는 세트별 통계 자료에서 Nadal은 분명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4세트에서 나아진 것은 언포스드 에러가 줄고, 상대의 서브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받아낸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숫자는 Medvedev의 우승 확률을 Nadal보다 아홉배나 더 높게 예측하고 있었다. Nadal은 숫자가 말하는 것과 별개로 그저 ‘바지 앞뒤, 양쪽 어깨, 코쓱귀쓱’을 이어나갔다. 토토는 하지 않지만 그에게 역베팅을 걸고 싶었다. Nadal은 호주 오픈 결승전을 5세트로 이끌었다. 그제서야 두 선수의 우승확률이 얼추 비슷해졌다. 



Medvedev는 경기가 네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Nadal의 경기력이 올라오자 신경이 곤두섰다. 심판과 볼키즈에게도 화를 냈다. 야유하는 관중에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허벅지 근육에 통증이 올라오면서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그럴 만도 했다. 테니스는 경기 내내 코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두 선수의 고독함은 5세트를 앞두고 앉아 있는 벤치에서도 느껴졌다. 5-3으로 Nadal이 앞서나가던 마지막 게임을 Medvedev가 뒤집었다. 세트는 5-5까지 갔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7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Nadal의 마지막 발리. 게임 클락이 5시간 24분을 가리키고 나서야 Nadal은 환한 미소와 함께 라켓을 코트에 내려놓았다. 4%의 확률로 Nadal은 21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인간의 의지가 숫자를 이길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나는 MBTI상 J이지만 계획을 적지 않는다. 물론 옛날에는 일일이 일정을 정리하고, 할 일을 하나씩 지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계획에 대한 강박이 유연성을 해한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를 주기로 했다. 심지어 어릴 적 높이뛰기 선수로도 아주 잠시 뛰어봤기 때문에 루틴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고 있다. 그래서 13가지의 루틴으로 유명한 Nadal이 이해가 되면서도 무섭고, 존경스럽다. 그는 사람들이 이 루틴이 자신에게 승리를 위한 징크스이며 미신이라고 얘기하지만 그저 테니스 경기에서 매번 하는 행동일 뿐이라고 한다. 경기에서 지든 이기든 말이다. 오른손에 리차드밀을 차지만 세계인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스포츠 스타는 겸손하다. 그는 정말 “Just Do It” 뿐이었다. 그의 후원사인 NIKE는 이런 그를 위해 우승 기념 영상 마지막에 “Advantage, Nadal”이라고 적었다. 



경기 중 듀스 상황이 되고, 

한 선수가 승리까지 한 점만 남겨 유리한 고지에 있을 때 AD(Advantage)라고 한다.



Advantage, Na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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