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음

기역 니은도 모르는데...

by 달빛시

대학 시절, 왕복 세 시간짜리 통학은 한 학기만에 끝났습니다. 나무에 푸른 물이 오르는 오월 무렵까지는 괜찮았지만 점점 찾아오는 더위. 버스 이빨 틈에서 새어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요. 결국 부모님께 '학교가 너무 멀어서 공부할 시간이 없다. 장학금을 탈 테니 학교 근처에 살게 해달라!'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엄마도 고등학생처럼 피곤해 하는 대학생 딸을 보면서 지지를 해주셨고요. 우여곡절 끝에 2학기 때부터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와도 살고 동생과도 살고요. 그렇게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지요. 그러고 보면 엄마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네요.


요리 하는 걸 좋아합니다. 자취를 오래해서 그런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 분가는 했지만 부모님표 반찬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요리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당시에는 밥솥에 있는 밥을 꺼내는 것도 귀찮아 할 정도였거든요. 가끔 음식을 만들어야 할 기회가 오더라도 베이컨은 철학자, 설탕이나 소금이나 하얀 건 매한가지, 그러니까 나는 설거지. 뭐 그런 식이었지요. 그랬던 제가 요리를 좋아하게 된 건 신랑 덕분입니다. 뭘 해줘도 맛있게 잘 먹어주었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요.


그런데 결혼 전에 신랑은 제가 음식을 잘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최소한 요고(요리 고자)는 아닐 거라고 여겼대요. 바로 죽 덕분입니다. 신랑이 감기에 걸렸을 때 바나나로 죽을 끓여다 주었거든요. 그게 태어나서 처음 끓인 죽이었는데, 바나나의 달달함이 맛을 덮어버린 것이지요. (그날 이후로 죽은 한 번도 끓여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슬슬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아이에게 밥을 줘야 하는 날이요. 그러니까 그땐 미음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응? 요리의 기역 니은도 모르는데, ㅁ...미음을 어떻게!


처음엔 이유식을 사서 먹일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어요. 그런데 모유를 넉넉히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천천히 밀려오더라고요. 거기에 '해보고 아님 말고'라는 무대뽀 정신이 등을 떠밀고, 임신을 했을 때 무슨 생각에선가 사둔 섹션 도마도 저에게 눈을 흘겼고요. 그래서 아기가 6개월이 될 무렵 부리나케 인터넷 검색을 했고, 미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해 보이는 (예뻐 보이는) 도구들을 구입했어요. 플라스틱보다는 유리 용기가 몸에 더 좋을 것 같으니 그걸로 하고, 믹서기는 있지만 자주 쓸 거니까 작은 걸로 한 개 더 사고, 냄비는 통3중이 좋다니까..! 뭐 이런 식이었지요. 그렇게 아기는 2018년 1월 3일에 첫 미음을 먹었답니다. 아니, 미음이라는 것에 혀를 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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